차 선배님께서는 미국 가시기 전에는 뭘 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 그리고 95사태 당시, 많은 회원들은 참성의 정체를 전혀 몰랐습니다. 싸움다운 싸움도 못한 체 혼란만 거듭되다가, 집행부는 악의 손에 넘어갔고, 조직은 4동강이 났는데도, 지금까지 악의 정체는 안개 속에 오리무중입니다.
지금도 대구에는 한 가족이 불교회, 선의연대, 53그룹 등으로 갈라져 이산가족처럼 흩어져 신심하고 있는 회원님들도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95사태 주동자들이 세상을 뜬 후에야 진상규명이 이루어질 것 같네요? 95사태 참성의 정체는 누구인지 목격자이신 차 선배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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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학회본부 직원이 되기 전에 쌍룡양회에 근무했습니다.
그러다가 1984년에 이즈미 지도장님의 추천으로 한국SGI 본부에 입사하여 선생님 직원이 되어 근무하면서 지도장님과의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1995년 한국SGI에서 95사태가 발생됐고, 다음해인 1996년 저는 이 문제로 조직을 문란 시킨다는 ‘파화합승’의 누명을 쓰고 한국SGI에서 강퇴 당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학회본부에 입사시킨 분도, 강제퇴직 시킨 분도 이즈미 지도장이십니다.
“석가여래를 위하여는 제바달다야말로 제일의 선지식이로다”(어서 917쪽) 이즈미 지도장은 권위적이었지만 저에게는 사제를 가르쳐 주신 선지식이십니다.
95사태의 무대에 제바로 등장한 지도장님을, 어서 말씀대로,
가책(엄하게 책함),
구견(추방),
거처(죄과를 물어 규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악을 방치하고 악과 싸우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악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Solvang, November 2011>
제가 학회직원에서 강퇴당하면서, 분한 것은 싸움도 제대로 못하고 물러섰다는 것입니다.
당시로는 누가 악이고 누가 부처의 군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악에 철저히 속고 있다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것은 청년들이 박덕현 이사장에게 등을 돌린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 고민했습니다.
“무엇이 청년들을 이사장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을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박재일은 박덕현 이사장의 비리를 이용해 청년부들을 포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부이사장인 나는 몰랐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에게도 이또상, 최남익, 안찬선, 등 여러 경로를 통해 회유가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저는 완강했고, 그들의 회유를 파벌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누가 뭐래도 박덕현 이사장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그랬기에 박덕현씨의 비리를 알려 줄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강직한 것이 실인지 득인지는 차치하고,
“교학력이 없는 지도자는 장래 반드시 괴로워하며 퇴보하고 말 것이다. 공부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그대 자신을 위해서이다.”라는 선생님의 지도말씀을 생각하며,
악(惡)을 간파하지 못한 자신을 맹 반성했습니다.
박재일은, 교활하게도 지도장의 권력을 등에 업고 이사장을 깔보며 하극상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박재일과 안 청년부장의 횡포를 막기 위해
‘청년부 물가리 인사’를 반대하며 부결시켰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즈미 한국지도장은 권력싸움을 막기 위해 ‘청년부 물가리 인사’를 부결시킨 저를 활동정지에 강퇴까지 시킨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즈미 지도장은 박재일로부터 박덕현 이사장의 부정부패에 대한 보고를 받고,
차기 이사장으로 박재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이사장은 박재일에게 이상할 정도로 꼬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사장은 부정부패로 박재일에게 코가 끼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 불교회는 요동치고 있는데, 박덕현 이사장은 자신의 비리가 폭로될 까봐 전전긍긍하고,
박재일은 이를 빌미로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심증은 있어도 물증을 발견 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도 통역 이또의 방해로 함흥차사였다는 것은, 아시는 바 대로입니다. 부이사장이라는 제가 이 정도였으니, 이를 지켜보는 회원님들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청년부 일대에서 오대에 걸쳐 구축한 난공불락의 불교회는, 박덕현과 박재일이라는 두 마리 사자신중의 벌레에 의해 서로 물어 뜯으며 무너져 갔습니다.
묘락대사는 “참성증상만 이야말로 가장 무섭다. 왜냐하면 그 정체를 간파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참성이란 성직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참성증상만은 항상 ‘인권의 편’이며, ‘민중의 편’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본성을 간파하는 것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의 사회도 역시 인권이나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 듯한 포즈를 취하는 인간은 많습니다, 그런 만큼, 말이나 조작된 허상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 여기서 “‘인권의 편’이며, ‘민중의 편’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참성은 누구일까요?
어리석고 오만했던 이즈미 지도장, 부정부패의 박덕현, 교활한 박재일입니다.
이들의 조작된 허상을 꿰뚫어 보지 못했던 것이 분할 뿐입니다.
● 조작된 허상의 가면 뒤에 숨은 박덕현과 박재일
저의 뇌리에서 이들의 조작된 허상의 가면이 벗겨진 때는, 제가 미국에서 1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가 옛 동지들을 만나고부터였습니다.
★ 가면 뒤에 숨겨진 95사태의 진실은?
1) 95사태는 박재일이 박덕현 이사장의 비리를 발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2) 박재일은 이사장의 비리를 미끼로 안 청년부장과 결탁하여 청년부를 포섭하며 차기 이사장 자리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3) 박재일은 장년부와 부인부를 포섭하기 시작했고, 포섭에 실패하면 박덕현 이사장을 시켜 반역의 올가미를 씌워 정적들을 제거시켰습니다.
이런 마녀사냥은 박재일이 박덕현의 비리를 폭로하지 않는 조건으로 비밀리에 진행됐다는 것이 여론입니다.
4) 박재일은 조기에 박덕현을 이사장에서 강퇴시키기 위해 ‘안기부 납치 조작사건’을 계획하고, 박덕현이 안기부를 시켜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는 자작극을 꾸몄지만, 김승룡씨의 대구 회관에서 가진 양심선언에 의해 거짓임이 만 천하에 밝혀집니다.
5) 이즈미 지도장은 ‘안기부 납치조작사건’이 박재일의 음모라는 것을 알면서도 박재일을 이사장으로 밀어붙여 1997년 4월 이사장으로 취임시켰습니다.
● 조작된당시 이즈미 지도장의 적절한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즈미 지도장의 가장 큰 실수는
이미 사자신중의 벌레라는 것이 밝혀진 박재일을 이사장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이는 광선유포를 외면한 오만의 극치입니다.
당시 이즈미 지도장은 정사가 기준이 아닌
“자기에 따르는 것만이 올바르고, 따르지 않는 것은 악”이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정론이 통하지 않는 것이 권력의 마성”이라는 선생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박덕현 이사장의 치욕적인 마지막 임기
부정부패로 코가 낀 박덕현씨는 치욕적인 대가를 치르고 겨우 이사장 임기를 마칩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부정부패와 마녀사냥에 대해서는 사과도안 한 체,
‘95사태’를 ‘박재일의 쿠데타’로 단정짓고, 95사태의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며 53그룹이라는 왕국을 만들어 내득 신앙에 들어간 지 십 수년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진상규명에 의해 확실히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당시 이즈미 지도장의 적절한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요?
선생님께서는 “참성의 정체를 민중에게 폭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부의 사람들만 자각하는 것으로는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행동을 일으켜 참성증상만을 드러나게 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석존이 즉각 제바달다가 이미 악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재빨리 모두에게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했다는 점이다”
이즈미 지도장은 회원들이 분동을 막기 위해 이들의 비리와 마녀사냥의 실태를 폭로하여 회원들의 분동을 막아야 했습니다.
★ 그러나 당시 이즈미 한국지도장은 이미 절대복종을 강요하는 괴물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는 석존의 강한 책임감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석존은 제바달다에게 속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나오게 하지 않겠다는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악인은 명확하게 악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중간한 대응으로는 모두가 헤매고 만다. 또 싸움에는 스피드가 중요하다.
우유부단하여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그 사이에 마가 틈타 먹히고 만다.”
석존은 제바달다의 악심을 재빨리 모두에게 전했습니다.
● 맺음 말
저는 1997년 학회에서 나와 지인의 권유로 건강에 관련 된 직장에 종사하며, 한의학을 공부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아내와 함께 미국유학을 결심하였습니다.
95사태는 아내와 저에게 많은 변화를 강요했습니다.
폭풍처럼 소용돌이 치는 경랑 속에서도 사제의 마음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 우리에겐 행운이었습니다.
“마음의 견고함에 따라 신의 수호 즉 강함이라”(어서 1220쪽) 사제의 마음이 견고함에 따라 제천선신의 수호도 강해짐을 배웠습니다.
“누군가가 지켜주겠지, 누군가가 우리 편이 되어주겠지,
이런 달콤한 생각에 빠져 있는 한, 그 생각 자체가 무간지옥이다.
전부 자신이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자신이 강해져야만 제천선신도 지키고 이길 수 있다”는 것이, 95사태가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