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창가르네상스 운동은 인간을 위한 종교개혁 운동
아큐/ 일월청정님의 댓글에 대한 답,
창가르네상스 운동은 인간을 위한 종교개혁 운동
아큐님! 소승 불법이든 대승 불법이든 문저 불법이든 승려를 부정하면 이미 불교가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 재가 신도가 승보가 될 수 있을까요? 오로지 지구상에서 학회논리 이게다 회장과 사제불리로 성불한다. ㅊㅊㅊ
어서 근본 신심 근본 하면서 왜 어서를 왜곡해서 사용하시는지요? 저 보고 술 취한 듯한 글을 올린다 했지요. 불법의 정사는 사중천심입니다.
이전경, 법화경 적문, 법화경 본문, 문저의 대성인 불법으로 정립해야 되고 수행은 삼세를 기준으로 하지 않으면 성불은 꿈 속에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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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승려를 위해 신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월청정님의 진솔한 댓글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는 저도 신도들을 위해 헌신하는 승려들을 존경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들의 권위를 이용해 신도들을 탄압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비리를 저지른다는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결국 그들의 오만은 신도단체인 창가학회를 파문까지 몰고 갔습니다.
백운락님의 “재가가 승보”라는 글에서도 밝혔듯이 학회 멤버들의 마를 간파하는 지혜는 탁월합니다. 서로 행학(行學)에 면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니치렌 불법에 입신하였지 승려를 위해 입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종문에서는 마치 개안공양이니, 타파공양을 해야만 성불하는 것처럼 회원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승속차별을 강요하며 회원들에게 군림하고 있습니다.
본래 종교는 인간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종교로 인간을 속박하며, 승은 위 재가는 아래라는 특권 의식을 갖고 스스로 부패해 가고 있습니다.
학회에서 추진하는 창가르네상스 운동은 “어본존이라는 근본으로 돌아가라” “대성인의 정신으로 돌아가라” “어서라는 원전(原典)으로 돌아가라”라고 하는 근본정신의 재생, 인간을 위한 종교개혁 운동입니다.
하버드대학교 야먼 교수는 “현재, 창가학회가 전개하고 있는 ‘종교개혁’은 일찍이 프로테스탄트 혁명이 기독교사(史)에 한 획을 그은 바와 같이 불교사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 운동입니다. 이 눈부신 혁신운동은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실로 종교사의 새로운 출발점이며 새로운 건설입니다.”
미국 델라웨어대학교의 고명한 철학 교수로 지금은 돌아가신 데이비드 노턴 박사도 유언처럼 역설해 주셨습니다.
“평화와 문화의 연대를 일본 내지 세계로 넓히는 창가학회의 활동을 비판하는 종문은 근시안적이며 맹목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종문을 맹목적으로 만드는가 하고 물으면 나는 ‘그건 질투가 그렇게 만든다’고 답변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종문의 ‘파문통고’는 모든 인간에게 불성(佛性)이 있는, 그런 풍부한 가능성을 막거나 자르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니치렌 대성인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역행한 것”이라고.
세계 지성의 투철한 안목에는 종문의 폭거, 어리석은 행위가 이처럼 명쾌히 비쳤습니다.
● 기독교 성직자는 인간보다도 상위에 있다고 착각
일월청정님이 승려라면 회원의 소리라고 생각하여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똑 같은 인간입니다. 존엄한 인간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나 종교상의 독선적인 엘리트 의식은 이 당연한 도리(道理)를 보지도 못합니다.
“기독교 성직자는 스스로를 신과 민중의 중간에 있는 자로서 민중, 평범한 인간보다도 상위에 있다고 착각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일신교의 교의가 자체적으로 가지는 위험성에서 유래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반해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불법은 일체중생의 불성, 불계를 인정합니다. 악과 단호히 싸우는 것은 당연하고, 불경보살처럼 사람들의 불성을 예배해 가는 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역사에서는 마녀사냥, 이단사냥과 같은 역사는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닛켄의 오만은 신도단체인 창가학회를 자신들에게 저항한다는 이유만으로 파문하였습니다. 이러한 야만적인 사고방식이나 행위는 절대로 불교가 아닙니다.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세계에서는 대자대비의 어본불에 대한 반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닛켄종을 사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일월청정님도 승려가 대성인과 민중 사이에 존재하며 민중보다도 상위에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이는 위험한 생각이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승보(僧寶)가 승려라는 생각만을 고집하시는데, 지난 번 댓글에서 “총별의 이의를 조금이라도 어긴다면 성불은 엄두도 못 내며”(어서 1055쪽)라는 어서말씀을 다시 한 번 배독하시기 바랍니다.
대성인께서는 “법화경을 일자일구라도 부르고 또 남에게도 이야기하는 자는 교주석존의 사자(使者)이니라”(어서 1121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승보의 승(僧)이란, 승려뿐만 아니라 법을 수학하고 전지해 가는 신도를 포함한 모든 제자를 의미합니다.
“삼보를 올바르게 전하고 호지하고 넓히는 화합승 그 자체도 넓은 의미에서 승보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에는 SGI(창가학회)가 승보에 해당합니다.”(교학의 기초, 161쪽)
● 내가 남묘호렌게쿄이며 내가 인과구시의 법체
대성인께서는 “기심(己心)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묘법이 아니라 추법이니라”(어서 383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심’은 자기 마음이며, ‘법’은 묘호렌게쿄입니다. 즉 내가 남묘호렌게쿄이며 내가 인과구시의 법체이기 때문에 벌도 공덕도 내가 만든 것입니다.
타파공양 등에 의해 성불이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기심에는 의심, 불안, 고통 등으로 나타나는 ‘원품의 무명’이라는 생명의 작용이 있습니다. 이것과 맞서 싸워야 불성이 용현되는데, 이 싸움을 신심(信心)이라고 합니다.
원품의 무명 중에 가장 지독한 것이 차별이라는 열등감입니다.
승려가 위(上)라는 생각이야말로 원품의 무명입니다.
내가 남묘호렌게쿄의 법체이고, 내가 부처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면, 자기 공덕만을 위한 타파공양 등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화타가 없는 타파공양은 자기만을 위한 소승경의 수행이기 때문에 성불은 없습니다.
우리는 허공회에서 맹세한 지용의 보살로서 민중구제의 사명을 위해 부석신명으로 투쟁하는 사자 왕의 전사로 금생에 추억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대성인께서는 “만약 심외(心外)에 도(道)를 구하여 만행만선을 수행함은 비유컨대 빈궁한 사람이 일야(日夜)로 이웃의 재보를 셀지라도 반전의 득도도 없는 것과 같다』(어서 383쪽) 사람들은 자기 생명에 존재하는 법을 다른 곳에서 찾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특별한 존재에 의지하기 위해 신심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에 있는 강력한 에너지를 끄집어 내어 스스로 자립하기 위해 신심 하는 것이다.
부탁한다는 타파공양은, ‘기심(己心)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밤낮으로 남의 재보를 세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내가 남묘호렌게교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추법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닛켄종은 사 종교입니다.
● 맺음 말
기독교의 성직자는 스스로를 신과 민중의 중간에 있는 자로서 민중, 평범한 인간보다도 상위에 있다고 착각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중세 암흑이라는 인류 최악의 시대를 연출하였습니다.
닛켄종은 어떤가요?
자신들만이 승보라는 우월감에 빠져, 혈맥상승은 오직 법주에게 있다고 민중을 속이고 있습니다. 이는 민중을 기만하는 행위이며, 불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닛켄종은 사교이며 무간지옥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