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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아큐/ 티베트불교와 달라이 라마

myungho 2014. 10. 19. 12:51

(o) 아큐/ 티베트불교와 달라이 라마  

 

 

2014 10 2. 인도 다람살라에서 열린 달라이 라마 노벨평화상 

25주년 기념식에서 시린에바디(제일 왼쪽, 이란, 2003년 수상)

     조디 윌리엄스(제일 오른쪽, 미국, 1997년 수상)와 함께 기념식장으로 향하는

     198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14대 달라이 라마

 

 

SGI불교 회원:

티베트 불교(佛敎) 무순 종()인지 아시나요? 제가 모르거든요?

잔다르마님의 게시글이 삭제되었네요.

 

 

 

한국불교도 소승에서 대승까지 여러 종파가 있듯이 티베트불교에도 여러 종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승이 명상에 잠겨 입적하는 모습을 보면 소승교가 많은 것 같습니다. 

 

소승교는 계를 수지하고 명상에 잠기는 수행을 거듭해 고뇌의 원인인 번뇌를 단절하고 평안한 경지인 열반을 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승교가 목표로 삼는 행복은 불행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이른 바 회신멸지입니다. 여기에 소승교의 한계가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없어지고 허공과 같이 된다”(어서 393) 그러게 되면 부처가 될 자신마저도 남지 않게 됩니다.

어떻든 티베트 국민은 달라이 라마를 나라를 수호하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기기 때문에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제25의 내용을 갖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진: 티베트 불교의 고승이 명상에잠겨 입적하는 모습>

 

 

● 티베트불교의 달라이라마

 

티베트를 생각하면 제일 처음 생각하는게 바로 달라이라마입니다.

 

티베트에는 달라이 라마 제도(制度)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로 비유하면 교황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티베트불교의 14대 수장인 달라이 라마(79, 위의 사진)국가 원수이자 실질적인 통치자이기도 합니다.

 

티베트에서는 달라이 라마를 비롯해 여러 고승들은 환생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인지 티베트인들은 항상 마니차를 돌리며 옴마니반매옴 이라고 외고 가족 중에 한 명이 훌륭한 승려가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현재 14대 수장인 달라이 라마도 193513대 달라이 라마가 죽었을 때, 환생수색대가 티베트 아무드 지방에서 찾아 냈다고 합니다. 수색대는 아이에게 선대 달라이 라마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을 물어보고 그 말에 답하면 환생임을 인정합니다.

 

티베트 국민은 달라이 라마(14)를 나라를 수호하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기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지극히 존귀하며 영성(靈性)이 뛰어난 성스러운 존재로 숭앙 받습니다.

환생은 티베트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불교에서도 핵심 사항입니다.

 

그러나 환생수색대나 선대 달라이 라마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을 물어본다는 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정말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14대의 달라이 라마(79)는 평화노벨상을 받을 만큼…… 그의 업적은 큽니다.  

참고로, 그는 1959년 중국에서 독립하려던 티베트 봉기에 실패한 뒤 인도 북부 다람살라로 망명했으며 이후 티베트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October 2014) 55년 만에 고향에 있는 불교성지 우타이산(오대산)을 순례하고 싶다는 뜻을 중국측에 전달했지만, 중국은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분열활동을 중단해야만 그의 귀국을 허용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져 접점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 법화경과 티베트를 수호하는 관세음보살

 

석존은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으로 성불했을 때, 모든 중생의 생명에 불계라는 부처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분제도의 사회에서 당신이 부처라고 말해도 믿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42년간 방편을 설하고, 8년 간 법화경을 설하셨습니다.  

 

무량의 경에서 석존은, 법화경의 개경인 무량의 경에서 40여 년 미현진실(未顯眞實: 40여 년 동안에는 아직 진실을 나타내지 않음)’이라고 설하여, 법화경 이전의 제경은 모두 법화경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한 방편(方便: 성불이라는 목적으로 이끄는 수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법화경 방편품에서는 “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 정직히 방편을 버리고 무상도를 설한다”고 하여 이전경의 방편(方便)은 법화경을 설한 후에는 버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법화경은 부처의 본회인 일체중생의 성불을 실현하기 위해 설해진 경전입니다.

방편품에는 “제불 세존은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을 열게하여 청정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출현하였다”(개결 167)고 있습니다.

 

초기의 경전에 깨달음을 얻은 석존은 “나는 내가 깨달은 법을 스승으로 하여 살아가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또 자신이 입멸 후 제자들에게는 “너 스스로를 너의 섬으로 삼고, 법을 너의 의지 처로 삼아라”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섬이란 격류 속 한가운데에 있는 섬을 이르는 것으로 의지 처를 뜻합니다. 자신이 깨달은 보편적인 진리를 스승으로 삼고 의지 처로 삼아서 살아온 사람이 석존입니다. 그리고 석존은 똑 같은 삶의 자세를 멸후 중생에게도 권유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대성인은 법화경 수량품의 문저에 비침되어 있는 삼세 제불이 성도하는 근원의 종자야말로 南無妙法蓮華經임을 밝히시며 삼세시방의 부처는 반드시 妙法蓮華經의 오자를 종으로 하여 부처가 되시었다”(어서 107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제25에 나오는 보살의 이름입니다.

  

● 묘법의 공력의 극히 일부분이 관음보살의 작용

 

 

대성인께서는 관음법화(觀音法華) 안목이명(眼目異名)”(어서 77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관음과 법화는 이름은 다르지만 그 안목은 같으며 묘법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이케다선생님께서도 관음보살이란 수량품에서 밝힌 구원 본불의 생명의 일부분입니다구원의 본불을 떠나서 관음보살의 생명은 없습니다. 혼이 없는 껍질과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의 본불의 생명, 어본존 속에 관음보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본존의, 묘법의 공력의 극히 일부분이 관음보살의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묘법을 수지하지 않고 관음을 신앙한다는 것은 본말전도입니다.

 

다시 말해 묘법(妙法)을 근본으로 하지 않는다면, 관음보살(觀音普薩)의 작용은 부분관이며 사견(私見)이 됩니다. 예를 들어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고 생각하여 부분을 전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 관음의 이름을 칭송한다는 것은

관음의 힘의 근원인 남묘호렌게쿄여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관세음보살의 관세음이란 세음(世音: 세상의 모든 음성)을 관()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음성을, 고뇌의 소리를, 커다란 자애로 받아들이고 포용해 그 소리에 대답해 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절실한 심정을 들어준다, 알아준다, 달려가 준다,

그 한 없는 다정함이 관음보살의 작용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흠모하여 따르는 비결도 거기에 있습니다.

 

관음품에 자비의 눈으로 중생을 본다”(법화경 636)고 있습니다. 자안(慈眼)으로 본다는 것은 단순한 동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실은 부처다. 그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관음품에서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이 일어서서 석존에게 질문합니다. ‘관세음보살은 왜 관세음이라 이름하였습니까?’라고,

석존은 대답합니다. 어떠한 중생이건, 어떠한 고뇌이건,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이름을 일심으로 부르면 관세음보살은 즉석에서 그 음성을 관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시키리라

 

관음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구제된다고 합니다. 이 이행(易行: 쉬운 수행)이라는 점이 관음 신앙을 널리 퍼지게 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문저(文底: 문의 오저(奧底)라는 뜻으로, 니치렌 대성인이 불법상으로 깊이 포착해 나가는 방법)에서 보면 관음의 이름을 칭송한다는 것은 관음의 힘의 근원인 근원의 본불 남묘호렌게쿄여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창제행(唱題行)입니다.

 

관세음보살의 관세음이란 세음(世音: 세상의 모든 음성)을 관()한다는 뜻입니다. 관음이 발휘하는 힘의 근원이란 묘법입니다.

어본존의, 묘법의 공력의 극히 일부분이 관음보살의 작용입니다.

 

관음보살도 묘법인 수량문저의 남묘호렌게쿄에 의해 사람을 구제하는 힘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원인 묘법을 떠나서 관음을 신봉한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대성인은 지금 말법에 들어와서 니치렌 등의 동류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것은 관음의 이익보다 천지운니와 같이 많으니라”(어서 77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관음품에 설해진 공덕도 대단한데, 그것과 천양지차라니 아무튼 굉장한 것입니다.

 

● 맺음 말

 

“관음의 이익보다 천지운니와 같이 많으니라”라는 어성훈을 잘못생각하여 자신의 인생이 운명을 지배하는 神이나 自然 등 외부 세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에 기복신앙으로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체는 자신입니다.

 

제천의 수호를 받는다는 것의 근본은 자신이 자신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마음의 견고함에 따라서 신의 수호 즉 강함이라”(어서 1220)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마음이 제천을 움직입니다. 그 사자왕의 일념이 이 제천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관음품에도 이 보살은 능히 무외(無畏)를 가지고 중생에게 베풀도다”(법화경 624) 무외란 두려움 없는 용기입니다. 제천이 또 관음이 우리들을 지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외의 신심으로 자기 자신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 속에 있는 관음보살의 힘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끌어내는 것이 신심입니다. 창제입니다. 광선유포를 향한 행동입니다.

 

도다선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조건에 속박당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든가, 형제라든가, 친구하든가, 의복이라든가, 주거라든가, 교제라든가, 세금이라는 것에 구속된 세계가 우리들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생명력을 갖게 되면 이러한 것을 속박이라 여기지 않고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해탈이라고 해도 그렇게 신비한 것은 아닙니다. 고뇌의 쇠사슬을 끊어버리는 대 생명력을 말합니다. 대 생명력 속에는 자비도 지혜도 복덕도 모함되어 있습니다.

한 없는 발랄함과 한없는 상냥함을 지닌 인격입니다.

 

아무리 퍼내도 바닥나지 않는 지혜로 가득 찬 생활입니다. 생명력이 온몸에 넘치면 이 괴로운 사바세계가 밝고 즐거운 세계로 바뀝니다. 그 곳이 영추산이 됩니다. 그 곳이 관음이 살고 있다는 보타락산이 됩니다.

 

참고문헌: 법화경의 지혜, 개목초강의, 티베트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