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법주숭배사상 /<67>전륜·금생에 성불할 수 있나요?

(67) 금생에 성불할 수 있나요?

myungho 2014. 1. 8. 08:03

 

금생(今生)에 성불할 수 있나요?   

묘법을 수지 하여 끊임없이 광선유포에 투쟁하는 사람이 부처

 

 

 

 

 

성불하면 색상장엄한 모습이 떠오르고, 머나먼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불은 역겁수행이 걸린다고 하던데, 니치렌 불법에서는

금생에 성불할 수 있나요?

 

 

 여설수행의 사람은 한사람도 남김없이 일생성불.

 

귀하의 말씀처럼 저도 성불하면 상상속에서나 생각할 수 있는

먼 미래의 인격이라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대성인께서는 여설수행의 사람은 누구나 한 사람도 남김없이 금생에 일생성불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성인께서는 법화경의 행자는 여설수행을 하면 반드시 일생 중에 한 사람도 남김없이 성불하느니라. 비유하면 봄 여름에 농사를 짓는 데 조만(早晩)은 있을지라도 1년 중에는 반드시 이를 거둬 들이듯 법화의 행자도 상중하근(上中下根)이 있을 지라도 반드시 일생 중에 증득(證得)하느니라”(어서 4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생 성불이야말로 신심의 근본 목적입니다.

본존님을 신수하여 순수하게 지행화타에 걸친 실천에 힘쓴다면 어떠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일생 중에 성불의 경애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 성불이란 현실 세계를 떠난 정토 왕생이 아닙니다.

 

성불이란 현재의 자신과 전혀 다른 특별한 인간이 된다거나, 현실 세계를 떠난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 등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대성인께서는  

 

성이란 연다는 의의이고”(어서 753) 성불이란자신 안에 부처의 생명을 여는것 외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자신의 생명에 불계를 열어 그 확고한 경애를 맛보고 즐기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법화경 수량품에서는 중생소유락이라고 설했습니다.

 

성불이란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 현실 세계에서 어떠한 일에도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 행복 경애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행복경애란 강건한 사람이 조금 무거운 짐을 지고도 유유하게 비탈길을 오르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명에 절대적 행복 경애를 확립한 사람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용수철로 하여 강한 생명력으로 역경을 유유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 성불이란 자신의 특질을 살려 자신을 가장 충실하게 만들어 가는 삶의 자세.

 

어성훈의 앵매도리(櫻梅桃梨)의 각기(各其)의 당체를 고치지 아니하고 무작삼신(無作三身)이라고 개견(開見)하면”(어서 784)라는 말씀처럼,

 

성불이란 자기 자신이 본래 갖고 있는 특질을 충분히 살려, 자신을 가장 충실하게 만들어 가는 삶의 자세라고 말씀하십니다.  

 

● 성불의 경애는 육근청정, 육근청정은 어떤 어려움에도 동요되지 않는 강한 경애

 

성불의 경애는 구체적으로 육근청정으로 나타납니다. 육근청정이란 우리들의 육근<안이비설신의> 즉 생명의 전체가 정화되어 원래 갖고 있는 작용을 충분히 발휘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도 동요되지 않는 강한 경애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대성인께서는 ()을 멸함은 공이라 하고 선()을 생 함을 덕이라고 하느니라, 공덕이란 즉신성불이고 또 육근청정이니라”(어서 76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계를 용현시키면서 그 생명력으로 악()을 멸하고 선()을 낳는 투쟁을 관철해 갈 수 있는 것 자체가 즉신성불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집행부의 악을 향해 스승으로부터 의탁 받은 진상규명을 위해 투쟁하는 것 자체가 즉신성불입니다. 어서를 근본으로 개혁연대의 투쟁을 보면 얼마나 위대한 육근청정의 투쟁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 맺음 말

 

성불이란, 목표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라

묘법을 수지하여 끊임없이 광선유포의 투쟁을 계속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사람이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법화경을 수지하고 제목을 부르는 사람들은 학회의 동지 이외에도 있습니다. 닛켄종처럼 타파공양이나 개안공양 등에 의지(依支)하여 부르는 창제라면 성불할 수 없습니다.

 

지용의 보살의 출현이 아이고서는 부르기 어려운 제목이니라”(어서 1360) 지용보살이라는 민중구제의 자각과 실천으로 제목을 부르지 않으면 참된 의의를 완수할 수 없습니다. <법련 2014 1월호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