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업전환 시리즈 ① 사도어서의 숙업 응시
자유게시판 3704의 “창가학회의 숙업전환 과연 불교의 가르침인가”라는 종문의 주장을 파절합니다. SGI 헌장에는 “SGI는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본의에 입각하여 세계로 광선유포 해 가는 단체”라고 있습니다. 학회의 교학은 일체가 대성인 불법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 신구의(身口意)의 삼업(三業)
대성인께서는 여인성불초에서 “일체중생은 법성진여의 도읍을 헤매어 나와서 망상전도의 마음에 들어간 이래 신구의(身口意)의 삼업(三業)으로 행하는 바 선근은 적고 악업(惡業)은 많도다”(어서 471페이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구의(身口意)의 삼업(三業)은 일체의 생명활동을 3종으로 분류한 것으로서 대비바사론 등에 설해져 있습니다. 마음에서 생각하는 사려분별을 의업(意業)이라 하고, 그것이 동작으로 되어 나타나는 것이 신업(身業), 언어표현으로 되는 것이 구업(口業)입니다.
원래 업(業: 카르마)이라는 말은 선악을 모두 포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업은 악업(惡業)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괴로운 일을 쉽게 잊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쨌든 악업의 전환이 종교의 큰 주제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 숙업은 헤아리기 어렵다.
대성인께서는 “또 방법을 생각함에 누가 알리요. 승의비구의 혼인가, 대천의 혼인가, 불경을 경훼한 유류인 것일까, 실심의 여잔인가, 오천상만의 권속인가, 대통제삼의 여류(餘流)이기라도 한가, 숙업(宿業)은 헤아리기 어렵다”(어서 958페이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은 종조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가르치는 종교와는 정반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까지나 같은 인간으로서 동고(同苦)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박해자였을지 모른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을 응시(凝視)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의 숙업을 근본적으로 구제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숙업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숙업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해 드리지요’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발할 것입니다.
창가학회의 위대함도 동고의 실천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숙업전환의 도상에서 괴로워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숙업전환을 위해 투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가학회는 숭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종문에서는 “창가학회의 숙업전환 과연 불교의 가르침인가”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숙업 자체를 가르치지 않는 종문? 그래서 닛켄종인 것 같습니다.
대성인의 숙명전환론에는 법화경에 설해 있는 열반경의 전중경수, 불경보살품의 기죄필이, 법사품의 원겸어업 등을 근거로한 다수의 어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서전집에 숙업은 업, 신구의 삼업, 과거의 방법, 과거의 비방정법, 선업, 숙업, 악업, 원겸어업 등으로 말씀하셨고, 전환은 죄장소멸, 기죄필이, 전중경수 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 대성인은 왜 이렇게 숙업을 응시하셨을까요?
<사도어서>에서 그 진의를 밝히고 있습니다.
“쇠는 불에 달구어 두드리면 검으로 되고, 현성은 매리함으로써 시험되느니라”(어서 958쪽) 이것이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설하는 숙업전환의 핵심입니다.
대성인의 불법은 쇠를 불에 달구어 쳐서 칼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단련하기 위한 신앙입니다. 마이너스의 죄장을 제로로 되돌리기 위해 숙업을 응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이너스의 죄장을 크게 플러스로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숙업전환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만인의 생명에 내재한 불성입니다. ‘불성을 향한 철저한 신’은 ‘숙업 응시’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단련하는 장이 대난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괴로워하고 있을 때가, 숙업을 응시의 마음이 가장 깊어질 때입니다. 대성인께서는 사도유죄의 결론으로 “결국은 천도 버리시고 제난도 당하여라, 신명을 바칠 뿐이로다”(어서 232쪽)라고 외치셨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하늘에게도 버림을 받았다고 해도 나는 내가 믿는 길을 당당히 걷는다. 결연히 일어선 생명은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강한 생명을 구축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대난은 죄장을 소멸하기 위한 계기입니다. 그리고 그 죄장을 소멸하면 앞에는 성불이라는 위대한 경애의 확립이 있습니다.
● 부처를 인간 이상의 어떤 특별한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본불님이라고 해도 인간입니다. 과거세로부터 숙업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부처를 인간 이상의 특별한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어디까지나 범부의 몸에 불계의 생명을 나타낸 범부즉극의 부처이십니다. 불계를 용현한다고 범부의 몸이 바뀌어 특별한 모습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또 불계의 생명을 중심으로 표현하면, 부처가 범부와 같은 모습을 나타낸 시동범부(示同凡夫)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게다가 서민 출신이라는 것을 긍지로 삼는 인간으로서, 대난이 숙업전환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몸소 증명하셨습니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대성인은 말법의 중생의 주사친이시기 때문입니다.
승속차별의 닛켄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니치준 후지모토라는 존문 총부는 SGI에 보낸 서신 중에서
“승려와 신도들간에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자만이다.”(1991.1.12)
“승복을 입은 승려는 특별하며 신도와 다르다. 항상 본존님과 함께 자리하고 있으며 승려가 다른 어떤 일을 하거나 인생을 호화스럽게 살던지 그것은 모두 괜찮다”(1991년 1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정도라면 정말 곤란합니다.
참고문헌: /승리의 경전 어서에서 배운다. 사도어서강의/ 어서의 세계/ 법화경의 지혜/ 어서사전/ 입니다.

종문은 대성인의 불법을 이미 오래 전에 배반하여 사종사의로 타락하였습니다.
종문은 우선적으로 창가학회를 깍아 내리고 비난하는 억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렇게하면서 중들은 위선과 거짓의 탈을 쓰고 어본불의 어서를 왜곡 내지 훼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석가불법이고 어떤 것이 대성인의 가르침인지를 모르는 것이 종문의 실정이고 헛소ㄹㅣ입니다!

“승려와 신도들간에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자만이다.”(1991.1.12)
“승복을 입은 승려는 특별하며 신도와 다르다. 항상 본존님과 함께 자리하고 있으며 승려가 다른 어떤 일을 하거나 인생을 호화스럽게 살던지 그것은 모두 괜찮다”(1991년 1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선북에 세뇌된 미혹 된 범들, 학회가 병든것은 숙명 전환의 원리를 호도하고 ,
명문명리에 사로 잡혀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을 사종화 했기 때문입니다 .
한마디로 이케다 회장은 숙명 전환의 원리를 모르고 있습니다 .
그는 숙명 전환의 문턱에서 명문명리의 바람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속지마셈

종문이 승려와 신도 간의 역할을 차별한다는 것은 당연한 바입니다.
우리는 어본불을 불법의 스승님으로 모시고
이케다등 선생님들을 인생과 조직의 스승으로 한다는 차원입니다.
종문은 어서를 호도하고 어서의 내용을 모르면서 악용합니다.
이미 어본존을 사종사의의 사물호ㅏ하고 광선유포를 막았습니다()

재가 단체인 학 회에서야 말로 구별도 아니고 차별때문에 종문으로 가게 되고
종문엔 원칙과 기준에따라 한결같은 질서가 존재하니 , 승속 일치의 수행은 일 생성불의 관건입니다 .
비논리적으로 말을 하면 , 대성인의 불법의 원칙을 훼 손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여기까지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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