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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숙업전환/ 절복은 자비

myungho 2014. 1. 31. 11:02

 

(U) 아큐/ 숙업전환의 자세 ⑤

절복은 자비/ 민중을 괴롭히는 반 인간주의 세력과 철저한 투쟁,

 

   

 

대성인께서는 재세시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타종을 비판하는 것은 조화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등의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대성인의 문하 중에서도 대성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절복에는 다투는 마음이 있으므로 수라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아래 내용은 이케다선생님의 저서인 어서의 세계, 개목초 강의, 법화경의 지혜에서 질문의 요지에 해당하는 내용을 발췌한 내용입니다.  

 

 

 

 

● 절복은 다투는 마음인가 투쟁하는 마음인가?

 

나기자: 만인의 성불을 위해 싸우는 것이 법화경 행자의 사명입니다.

그런대 대성인 재세시, 대성인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타종을 책하는 것은 불교답지 않다, 타종을 비판하는 것은 조화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등의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이혜영: 타종에서 비난할 뿐만 아니라 대성인 문하 중에서도 대성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있었지요.

나기자: 대성인께서는 사도초에 이런 문하에게 의심을 일으켜 법화경을 버릴 뿐만 아니라, 도리어 니치렌을 교훈하고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벽인(璧人)”(어서 960)이라고 통렬히 파절하십니다.

 

아큐: 이렇게 대성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각 이면에는, 불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뿌리 깊이 깔려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광호: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불교라고 하면, 열반이라는, 번뇌를 완전히 단절한 정적인 경지를 획득하는데 있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혜영: 그래서 수행은 마을에서 떨어진 산에 들어가 현실 세계에서 도피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구태여 말하면 현실의 괴로운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향을 구하는 사상입니다.

나기자: 이런 생각은 이전경 중에서도 소승경에 해당합니다. 이는 정직사방편으로 법화경을 설한 후에는 버려야 할 방편이라고 석존은 설하고 있습니다.

 

이혜영: 이렇게 생각하는 한 부처의 진실한 정신 투쟁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유광호: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참된 불교는 가공의 천지(극락왕생 등)에서 이상향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의 괴로움이 소용돌이치는 사바세계에서 이상을 실현하는 현실 변혁의 사상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큐: 불법의 목적은 현실과 투쟁하면서 어떤 폭풍우도 극복하는 강인한 생명을 획득하는 것입니다불법의 가르침의 진수는, 물결도 없는 잔잔한 작은 연못같은 평온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도가 소용돌이 치는 대해(大海)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행복 경애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이혜영:나는 풍파가 싫다, 작은 행복만 있으면 된다라고 해도, 폭풍은 그런 사정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폭풍이 불면 반드시 파도는 일어납니다.

 

아큐: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숙명과 무명의 폭풍 속을 의연하게 전진하는, 근본적인 불계의 힘을 발휘해야, 비로소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투쟁해야만 행복은 실현할 수 있습니다.

나기자: 들개처럼 짖어대는 닛켄종과 집행부의 악구매리의 폭풍우 속을 당당하게 전진하는 정법정의의 사람들이야 말로 최고의 행복자입니다.  

유광호: 자타가 함께 행복을 구축하려면, 사람들에게 악연이 되는 잘못된 사상, 종교와 투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절복입니다.

나기자: 절복에는 다투는 마음이 있으므로 수라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에 대해, 대성인은 절복은 자비이고 악과 투쟁하는 마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큐: 그것은 부처의 마음이므로, 절복은 부처와 불이(不二)의 마음으로 실천하는 수행이며 말법시대 보살도입니다.

 

● 섭수와 절복

 

나기자: 대성인께서 말씀하시기를, 불도수행에는 섭수와 절복 두가지 뜻이 있다고 설하십니다.

이혜영:무지(無智), 악인(惡人)이 국토에 충만할 때는 섭수를 우선으로 하니 안락행품과 같으며, 사지(邪智), 방법(謗法)의 자가 많을 때는 절복을 우선으로 하니 상불경품과 같으니라”(어서 235)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유광호: 안락행품을 실천할 경우에는 무지, 악인이 많을 때이며 섭수를 실천합니다.

나기자: 무지(無智)는 불법을 접할 기회가 없어 불법을 모르는 사람을 말하며, 악인(惡人)은 불법을 모르기 때문에 자각 없이 악을 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큐: 이에 대하여 사지(邪智), 방법(謗法)의 자가 충만할 때는 불경보살이 장목와석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예배행을 계속했듯이 절복행을 우선합니다.

이혜영: 사지(邪智)는 정법을 알면서도 자신의 미혹과 욕망에 사로잡혀 잘못된 법에 집착하고 그것을 정당화하여 넓히는 자입니다. 방법(謗法)의 자는 정법을 믿지 않고 강하게 반발하며 비방하는 자입니다. 닛켄종 사람들과 똑 같습니다.

 

이혜영: 선생님께서는 “오노승의 본질도 겁쟁이다. 역풍에 휘말려 타지옥이 되어버렸다. 오노승도 섭수에 휘말리고 말았다”라고 힐책하셨습니다. 섭수는 타지옥입니다.

유광호: 상대방 감정이나 눈치만 살피고 있다면오히려 상대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돕는 꼴이 됩니다.

 

● 사지 방법의 자가 충만한 말법에는 오로지 절복

 

나기자: 섭수와 절복을 선택하는 근본 기준은 때입니다

이혜영: 대성인께서 재세하셨을 때에는 권실(權實)이 잡란하여, 법화경의 진의를 지켜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이 불교 파괴에 가담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유광호: 천태(天台), 진언(眞言)의 학자들이 염불(念佛), ()의 단나에게 아첨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 모습을 개가 주인에게 꼬리 치고 쥐가 고양이를 무서워함과 같으니라”(어서 236)고 갈파하셨습니다.

나기자: 쥐가 고양이를 무서워함이 집행부의 권위와 같다고나 할까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의 횡포는 똑같습니다.

 

이혜영: 그뿐 아니라 국주와 위정자에 대한 파불법의 인연, 파국의 인연이 설해져 있습니다. 국가의 사상적 혼란이 국가 쇠망의 근원이며 국민의 고뇌를 야기하는 원흉입니다.

아큐: 이런 상황에서 만약 수수방관하고 정의를 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법 신자로서 정신적 패배이고, 종교인으로서 혼이 죽었음을 뜻합니다.

 

나기자: 대성인은 현실을 떠나 산림에서 수행하는 자들을 일어서야 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섭수, 절복을 시에 따라야 하며라는 원리에 위배되므로 금생에는 아귀도에 떨어지고 후생에는 아비지옥에 떨어집니다. 어찌 생사의 고뇌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통렬히 파절하셨습니다.

 

아큐: 말하자면 법화경에 적대하는 종교인, 그 신봉자, 그리고 법화경의 적을 보고도 방치하며 싸우지 않는 법화경 수행자, 이 삼자가 만들어 낸 독이 충만하여 나라가 독에 물드는 것이 사지(邪智), 방법(謗法)의 나라입니다.

나기자: 말법 사지의 나라는 절복이 제일입니다.

 

이혜영: 닛켄종과 불교회 집행부를 생각하면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방법 가책을 위해 분발하지 않으면 호법을 실천할 기회는 없습니다. 민중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백운락 카페의 사명이야말로 막중하다고 생각합니다.   

 

● 민중을 괴롭히는 반 인간주의 세력과 철저히 투쟁

 

나기자: 법화경의 사상은 보편적인 가치와 만인의 존엄성과 평등을 구가하는 경전입니다.

현대에서도 인간주의 깃발을 내걸고 우뚝 솟아 있는 최고봉의 경전입니다.

아큐: 그러나 일단 반인간주의(反人間主義) 세력이 생겨나 법화경의 정신을 왜곡하면 그런 사의와는 철저히 투쟁합니다그것 또한 법화경의 사상입니다.

 

유광호: 법화경에는 그런 악세에서는 법화경 행자를 박해하는 세력과 투쟁하게 될 것이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나기자: 법사품(法師品)의 유다원질 황멸도후, 보탑품(寶塔品)의 육난구이, 권지품(勸持品)의 삼류의 강적, 모두 그런 무명, 만심과 투쟁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큐: 니치렌 불법의 절복 실천도 이와 똑같습니다. 민중을 괴롭히는 모든 세력과는 철저히 투쟁하는 한편, 민중을 근본으로 하는 사상이라면 거기서 불교와 상통하는 정신을 발견하려는 관대함을 갖고 있습니다.

이혜영: 절복은 어디까지나 부처의 자비행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절복은 상대방을 존경하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절복을 해 본 사람일수록 깊이 실감할 것입니다.

 

유광호: 절복에는 다투는 마음은 없습니다. 따라서 배타주의, 독선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절복의 근간은 어디까지나 자비입니다. 또 자비를 용기로 바꿔 악과 싸우는 파절정신입니다.

나기자: 인간에게 가장 기초가 되는 종교 자체가 혼란스러울 때,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려는 잘못된 사상과 종교의 횡포에 대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법의 자비가 아닙니다. 

 

● 자비없이 거짓으로 친함은 그의 원적

 

이혜영: 악과 싸우는 절복 정신의 중요성에 대해 대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물어 가로되, 염불자나 선종 등을 책하여 그들에게 미움 당하여 어떤 이익이 있는가

나기자: 이 질문에 대해 열반경을 인용하여 답하십니다.

석존은 제자들에게 호소한다. 불법의 파괴자에 대해 가책(책함), 구견(추방), 거처(규탄)라는 의연한 투쟁에 도전하지 않는 자는, 비록 불제자일지라도 불법의 적이 된다. 투쟁하는 자가 진실한 불제자, 호법의 성문이 된다

 

아큐: 이것을 <열반경소(涅槃經疏)>에서 불법의 파괴자에 대해 () 없이 거짓으로 친함은 오히려 그의 원적이 된다고 설합니다. 여기에 절복은 자비의 행위임이 명확히 밝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광호: 신심과 자비심에서 일어나는 만부득이 한 행동이 절복입니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혜영: 자신의 부모를 남이 살해하려 하는데 부모에게 알리지 않을 수 있는가, 악역 무도한 자식이 술에 취해 부모를 죽이려 하는데 말리지 않을 수 있는가, 악인이 사원에 방화하려 하는데 저지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나의 자식이 중병일 때 치료하지 않을 수 있는가”(어서 237쪽 통해)

 

아큐: 자비의 대극이 거짓된 마음입니다. 상대의 악을 알면서 방치하는 거짓된 마음이 사회를 뒤덮으면 기만이 당연한 것이 되고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게 되어 도리어 사회는 뿌리부터 썩고 맙니다. 종교는 사회의 기둥입니다.

나기자: 그 종교계에서 인간을 예속하는 종교’ ‘인간을 수단화하는 종교가 횡행하는 것은 이를테면 인간의 혼에 독을 타는 것과 같습니다.

 

이혜영: 그러므로 대성인은 법화경의 적이라고 하시면서 단호히 투쟁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떠한 대선(大善)을 만들고, 법화경을 천만부 읽고 서사하며, 일념삼천의 관도를 득한 사람일지라도, 법화경의 적을 책하지 않는다면 득도하기 어려우니”(어서 1494)

유광호: 절복은 마를 타파하고 무명을 단절하여 어디까지나 민중의 행복을 실현하는 고귀한 정신 투쟁입니다. 그것이 사자왕의 투쟁하는 마음입니다. 금강불괴의 생명이 그 투쟁에서 단련됩니다.

 

아큐: 우리는 자비의 투쟁을 일으켜 자신의 타성, 방심, 비겁 등 생명에 낀 녹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한 사람을 구제하고자 지혜로운 투쟁을 관철하는 사람은 인간을 속박하는 고정관념, 인간을 소외하는 불신의 무명을 타파할 수 있습니다.

이혜영: 인간을 속박하는 고정관념은 승속차별 의식의 닛켄종에서, 인간을 소외하는 불신의 무명은 신을 숭배하는 사상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나기자: 악과 투쟁하는 사람은 정신의 부패를 물리치는 맑게 흐르는 물로 자기의 생명도 닦아, 만인이 행복해 지기를 기원하는 광대한 경애를 한없이 열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생에 인계의 더할 나위 없는 추억을 생명에 새길 수 있습니다.

아큐: 광선유포를 위한 인생의 영광은 끝까지 투쟁하는 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