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호/ 신앙은 자기 일념의 대혁명
닛켄종, 집행부 모두 도둑놈 같습니다. 학회파문 당시 닛켄에게 파문 당했습니다. 한국불교회의 95사태 당시 집행부로부터 ‘SGI반대파’라는 모함을 받으며 퇴출당했습니다.
학회를 파문시켰으면 사과부터 한 다음에 다른 말이 오고 가야 하는데, 닛켄종 사람들은 염치도 없습니다. 무대포입니다. 그러니 이쪽에서 화가 납니다. 닛켄종 사람들이 카페에 와서 무슨 말을 하면, 속이 뒤집어집니다.
십 수년 간을 좌담회도 못나가고 혼자서 신심 하다 보니, 입으로는 큰소리 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외롭고, 쓸쓸하고 두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독함, 초조함, 불안함이나 절망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까?
대성인께서는 “법문(法門)을 가지고 정사(正邪)를 밝혀야 하느니라, 이근(利根)과 통력(通力)에는 의하지 말지어다”(어서 16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계추억님은 “자기의 창조적 독창적인 말씀을 하세요. 앵무새 식 해석하지 마시고요.”라고 말씀하시던데, 개인의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말이라고 해 봤자, 숙명도 모르는 “이근(利根)과 통력(通力)”일 것입니다.
저는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꿰뚫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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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자신이 파괴되지 않는 정토에 있다고 확신
솔직한 질문입니다. 후배님 같은 분이 있다는 자체가 행복입니다.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제십육의 “아정토불훼(我淨土不毁) 이중견소진(而衆見燒盡) 우포제고뇌(憂怖諸苦惱)/ 여시실충만(如是悉充滿)”에 대한 내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를 해석하면 “나(석존)의 정토는 파괴되지 않는데, 중생은 세상이 모두 불타 버리고 근심과 두려움 등 여러 가지 고뇌가 충만하다고 본다”라고 읽습니다.
‘아정토불훼(나의 정토는 파괴되지 않는다)’. 구원의 부처에게 이 사바세계는 불국토입니다. 부처가 중생을 구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본무대’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파괴될 리가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일념에 담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지금 자신이 파괴되지 않는 정토에 있다고 확신하면 그 확신이 그대로 무너지지 않는 용기와 끝없는 희망으로 나타납니다. ‘무상의 예토(적광토)’를 본래의 ‘상주의 정토(불국토)’로 바꾸려는 ‘변혁의 힘’이 넘쳐 흐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정토라 하고 예토라 해도 둘의 차이가 없으며, 오직 우리 마음의 선악에 달렸다고 쓰여 있다.”(어서 384쪽, 통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마음 하나로 세계가 변합니다. 인간 생명의 변혁이 곧 평화를 실현하는 근본입니다.
신앙은 내 일념의 대혁명
‘이중견소진’은 미혹에서 미혹으로, 어둠에서 어둠으로 유전하는 중생의 눈에 비치는 사바세계입니다. 중생의 눈에는 세상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보입니다. 그래서 겁화(세계를 멸망시키는 큰 불)에 세상이 완전히 타 버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겁화가 아니라 자신의 ‘번뇌의 업화(業火)’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견’이라는 글자가 중요합니다. 중생은 이 세계를 고뇌가 충만한 땅으로 보지만 부처는 엄연히 불국토이며 정토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어떤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모두 꿈으로 돌리고 법화경에 대해 계속 깊이 사색하시오.”(어서 1088쪽, 취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꿈으로 돌리고’, 대단한 정신력입니다. 일념의 힘이고 신심의 힘입니다. 신앙은 ‘자기 일념’의 대혁명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변혁의 원동력이 있습니다.
이 힘을 모르는 집행부나 닛켄과 같은 사람에 대해 “이 여러 가지 죄를 지은 중생은 악업의 인연으로 아승기겁을 지나도 삼보의 이름을 듣지 못한다”라고 설했습니다. 여기서 ‘죄’는 묘법에 대한 불신이고, ‘악업의 인연’은 끊임없이 번뇌·업·고가 반복됨을 뜻합니다.
인과(因果)를 안다면 회원들의 인권을 유린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불국토에 있어도 스스로 자기 주위를 안개로 가려 눈앞에 있는 부처를 보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불신’ 때문에 완고히 마음의 문을 닫아 아승기겁이라는 긴 세월 동안 삼보의 이름마저 듣지 못합니다.
조직을 분열시킨 집행부와 닛켄종을 위해 기원해야 합니다.
● 언제나 어본존과 함께, 순수하고 올바른 신심을
“제유수공덕 유화질직자 즉개견아신 재차이설법 혹시위차중 설불수무량 구내견불자 위설불난치
(諸有修功德 柔和質直者 則皆見我身 在此而說法 或時爲此衆 說佛壽無量 久乃見佛者 爲說佛難値)”
이를 해석하면 “많은 공덕을 닦아서 유화(열린마음)하고 마음이 똑바른 자는 모두 내(부처) 몸이 이곳에 존재해 법을 설하는 모습을 본다. 어떤 때는 이 사람들에게 부처의 수명은 무량이라고 설한다. 오랜만에 겨우 부처를 본 자에게는, 부처는 만나기 어렵다고 설한다”입니다.
위의 단에서는 전도(顚倒)의 중생이 현실세계를 고뇌가 충만하고 겁화에 불타는 세계로 본다고 설했습니다. 여기서는 순수하고 올바르게 신심을 관철하는 사람은, 부처가 중생을 구하기 위해 법을 설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묘법의 공덕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 마음이 유화한 사람은 항상 부처와 함께
여기서 ‘유화(柔和)’는 ‘완고함’과 ‘편협함’을 버린 ‘열린 마음’입니다. 선입관이나 편견, 세상의 체면 등에 구애하지 않고 바른 것을 바르다고, 있는 그대로 보는 정신입니다. ‘질직’은 ‘똑바름’ ‘정직’이라는 뜻입니다. 선하고 위대한 것에 ‘똑바로’ 향해 찾아 가는 자세입니다.
‘유화질직’한 사람은 영원한 부처가 보입니다. ‘언제나 부처와 함께 있다.’ ‘항상 부처와 함께한다.’라는 ‘확고한 안심’ 속에 고독함이나 초조함, 불안함이나 절망감을 극복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 묘법을 질직하게 행하면 대공덕이
우리에게 ‘유화’ ‘질직’은 어본존에 대한 신심이고 그 수행은 자행화타에 걸친 창제행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이 법화경 본문의 간심인 묘호렌게쿄는 삼세(三世) 모든 부처가 받은 만행만선(萬行萬善)의 공덕을 모아서 오자(五字)로 하였으니.”(어서 1282쪽, 통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제가 바로 모든 공덕의 구극이자 원천입니다.
‘즉개견아신 재차이설법’은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법을 설해 언제나 부처의 자비에 감싸여 부처의 지혜대로 살 수 있음을 뜻합니다. ‘언제나 어본존과 함께’ ‘언제나 대성인과 함께’라는 신심에 서는 사람은 그 무엇도 두렵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목을 부르며 지혜를 다해 유유히 도전하면 됩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수호 받습니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어느 때는 부처의 수명이 무량하다고 설한다. 오랜만에 부처를 본 자에게는 부처는 만나기 어렵다고 설한다.”라는 경문에는 부처의 위대한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문저로 보면 어본존의 위대한 공덕을 밝힌 곳이기도 합니다.
‘부처는 계속 존재하지만 여간 해서 만날 수 없다.’ 모순된 표현 같지만 이 말은 자아게의 주제입니다. ‘부처는 계속 존재한다.’라고 하면 중생은 부처에게만 의존합니다. 그러나 부처는 중생이 자립하기를, 모든 사람이 자기 생명에 부처의 경애를 열기를 원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한국 SGI도 자립하여 성장하기를 바라고 게실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최고의 방편인 입멸(죽음)을 나타내 부처를 구하려는 구도심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 맺음 말
대성인은 말법의 일체중생을 구하고자 영원한 생명을 어본존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유화질직한 신심으로 어본존을 대성인의 존극한 생명이라고 느끼고, 어본존 즉 대성인 생명을 내 생명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어본존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처는 만나기 어렵다고 설한다.’라고 한 문저의 뜻입니다.
‘지금’이 소중합니다. 언제나 ‘지금부터’입니다. 우리 생명은 부처와 같이 영원하고 불멸하며 존귀합니다. 순간의 일념, 생명 속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지금을 소중히 하는’ 불법의 근본정신과 생명존엄 사상도 있습니다.
- 이케다 선생님 방편품, 수량품 강의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