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참고문헌 1·4-1·11/<1-6>단결어서, 생사일대사 혈맥초

(1-6) 단결어서, 생사일대사혈맥초

myungho 2012. 4. 19. 04:42

 

(2) 이체동심 단결 중점 어서

생사일대사혈맥초

 

 

 

 

(1-2) 이체동심 단결 중점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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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시즈오카현 최고 협의회 1990. 12. 3)

대성인은 「마쓰노전답서」속에서 마쓰노 전이 질문하신 「성인이 부르시는 제목과 우리들이 부르는 제목과 그 공덕에 차이가 있습니까」 라는 의문에 대해서 「차이는 없다」라고 대답하신 다음에 「다만 법화경의 마음에 배반하여 부르면 차이가 생긴다.」라고 가르치시고 있다.

그 「법화경의 마음에 배반하는」것을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10/ 십사비방이다. 바꾸어 말하면 십사비방이 없다면 창제의 공덕은 똑같으며, 헤아릴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마쓰노전 답서」에서는 묘락대사의 법화문구기의 다음의 글월을 인용하시어, 십사비방을 밝히시고 있다.

 

「악()의 인()에 십사(十四)가 있으니 일()에는 교만(橋慢), ()에는 해태(懈怠), ()에는 계아(計我), ()에는 천식(淺識), ()에는 착욕(着慾), ()에는 불해(不解), ()에는 불신(不信), ()에는 빈축(嚬蹙), ()에는 의혹(疑惑), ()에는 비방(誹謗), 십일(十一)은 경선(輕善), 십이(十二)는 증선(憎善), 십삼(十三)은 질선(嫉善), 십사(十四)는 한선(恨善)이니라」(어서 1382)라고.

 

이 법화문구기의 글월은 법화경 비유품의 「만약 사람이 믿지 않고 이 경을 훼방하면 즉 일체 세간의 불종을 끊으리라」(만약 사람이 믿지 않고 이 법화경을 비방한다면 일체 세간의 부처로 되는 종자를 끊어버릴 것이다)라는 유명한 글월을 포함한 구절을 석한 것이다.

법화경 즉 「정법」에 대한 비방과 「정법을 믿고 행하는 자」에 대한 비방이 함께 지옥의 인()으로 된다는 것을 밝히시고 있다.

 

♧ 법에 대한 비방

그 중에서 처음의 십비방(十誹謗)은 「법」에 대한 비방이다.

「교만」이란 스스로가 오만불손하여 정법을 업신여기는 것을 말한다. 타인보다 자기가 뛰어났다고 하는 만심을 일으켜, 자기를 존귀하다 하여 보다 높은 법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법화경의 방편품 제2에서 석존이 삼승(성문, 연각, 보살)의 방편을 열어 일불승의 법을 설하려고 했을 때, 회좌에서 퇴장한 증상만에 빠진 5천명의 중생이「만()」에 해당한다고도 하시고 있다.

「해태」란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다. 단순히 불도수행을 태만히 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자기의 현재의 경지를 최고라고 여기고, 자진해서 보다 높은 법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계아」는 외도(인과의 법칙이 아닌 가르침)의 아견에 집착하는 것.

「천식」이란 천박한 지식에 집착하는 것이다. 세간의 천박한 지식으로 만족하고, 불법의 보다 깊은 가르침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착욕」은 본능적인 욕망에 집착해서 불법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불해」란 정법의 교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현재 상태에 만족해 버리는 모습이다.

「불신」이란 문자 그대로 정법을 믿지 않는 것을 말한다.

「빈축」이란 정법을 듣고 얼굴을 찡그리며 눈살을 찌푸리는 것인데, 자기의 모습으로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법을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의혹」은 정법을 의심하고 미혹하는 것이다. 불신이 처음부터 정법을 믿지 않거나 혹은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의혹은 일단은 믿어도 그 후 여러 가지 연에 분동 되어 의심을 일으켜 미혹하는 것을 말한다.

열번째의 「비방」은 정법을 믿지 않고 헐뜯고 욕하는 것이다. 「비()」도 「방()」도 「비난하다」「욕을 한다」라는 의미이다.

이상 十비방이 나타내듯이 정법비방(방법)이란, 정법을 「헐뜯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법을 「구하려고 하지 않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일념이나 행위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 사람에 대한 비방

또 그 다음 四비방은 「사람」에 대한 비방이다.

「경선」이란 선행의 사람. 즉 정법을 믿고 행하고 있는 사람을 경멸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이다.

다음의 「증선」은 정법을 믿고 행하고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다.

「질선」은 정법을 믿고 행하고 있는 사람을 질투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의

「한선」은 정법을 믿고 행하는 있는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다.

이 십사비방에 대해 비유품에 「그런 사람은 목숨을 다하고 나서 아비옥에 들어가리라」- 정법을 수지한 사람을 비방한 자는 목숨이 끝나면 아비지옥에 떨어진다. 라고 설해져 있듯이, 지옥에 떨어지는 업인(業因)으로 되는 것을 밝힌 것이다.

 

♧ 제종(諸宗)에게는 절복, 문하(門下)에게는 섭수

그런데 이 십사비방에 대해 총본산 제59세 니치코(日亨) 상인은 <유사화의초(有師化儀抄) 주해(註解)>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해 주시고 있다.

 

“종조성인(宗祖聖人)이 방법이란 명칭을 사용하신 것은 대외적 화타(化他)에 많으며 대내적 자행(自行)에는 적도다. 「마쓰노초(松野抄)」에 십사비방을 열거하신 것은, 늘 훈계하시는 방법(謗法)의 분석(分釋)은 아니로다.(<후지종학요집(富士宗學要集)>1)

 

- 종조 대성인이 방법이라고 하는 명칭을 사용하시고 있는 것은, 대부분은 대외적인 절복·화타를 위해서이고, 내부의 문하에 대하여 자행의 본연의 자세로서 사용하신 예는 적다. 「마쓰노(松野)전답서」에 십사비방을 열거하시고 있는 것은 평소에 훈계하시고 있던 방법을 분류(分類)하여 해석하신 것은 아니다 - 라고.

 

대성인은 염불(念佛) , 제종(諸宗)의 승려에 대해서는 엄하게 방법이라 하여 파절하셨다. 그러나 문하에 대해서는 방법의 명칭은 거의 사용하시지 않고, 신심의 심화를 촉구하시면서 크게 포용하시고 있다. ‘십사비방’의 이름 아래 신심을 어렵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대성인의 심정이었다고 배견된다. 이 십사비방을 대성인이 드신 것은 방법의 형태를 하나하나 분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니치코 상인은 그 뒷부분에서, 대성인은 ‘십사비방’ 중 ‘불신’과 ‘비방’의 두 가지는 자주 쓰셨지만, 나머지 열두 가지의 명칭을 사용하신 적은 적었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대성인이 십사비방의 하나하나를 똑같이 문제로 삼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 ‘서로 헐뜯는 일 없이’

또 니치코 상인은 이렇게도 말씀한다.

「자신을 다스리고 경계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은 자유라 하더라도, 함부로 12/ 다른 사람을 미워하여 방법의 죄명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약실(若實) 약불실(若不實) 도리어 그 중죄(重罪)를 자기에게 초래하니 두려워할 지어다」(<후지종학요집>1)

 

- 십사비방을, 자신을 다스리고 자신의 몸을 경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을 함부로 사용하여 타인에 대한 증오에서 방법의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가령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도리어 비방의 중죄를 자기가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다.― 라고.

대성인은 ‘십사비방’은 재가, 출가에 걸친다고 하신 후에, 신심하고 있는 사람을 비방하는 자의 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떠한 경우라도 법화경(法華經)을 가진 자를 서로 헐뜯지 말지어다. 그 까닭은 법화경을 가진 자는 반드시 모두 부처이며, 부처를 헐뜯는다면 죄를 받는 것이니라.(어서 1382)

 

- 어떠한 경우라도 법화경(어본존)을 수지한 자를 서로 비방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법화경(어본존)을 수지한 자는 반드시 모두 부처이며, 부처를 헐뜯으면 죄가 되기 때문이다 -라고. 진실로 고맙고 또 엄한 말씀이다.

 

또 니치코 상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근래 간혹 항도(巷途)의 설을 듣자니, 13/ 누구는 무슨 짓을 했으니 방법이라고 말하는데 악언(惡言)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되느니라”(<후지종학요집> 1)

 

- 최근 아무개는 무슨 짓을 했기 때문에 방법이라고 하는 말을 간혹 듣는 일이 있다. 그와 같은 악언은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 라고.

니치코 상인의 당시에도 “아무개는 이런 짓을 했기 때문에 방법이다”라고 하듯이, 동신(同信)의 자()를 방법자라고 부른 예가 간혹 있었던 것 같다. 상인은 그러한 악언악구는 삼가야 된다고, 엄하게 훈계하시고 있다.

 

♧ 따뜻하게 서로 격려하는 세계

당연히 방법은 엄하게 훈계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우리들은 진심으로 신심에 면려하고 있는 ‘광포원정(廣布遠征)’의 동지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다고 해서 방법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불법자의 태도는 아니다.

그런 거북하고 답답한 마음을 갖게 하는 지도자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따뜻하게 가르치고 잘 타이르면서 자유롭게 환희에 불타서 신심을 관철해 갈 수 있도록 격려해 가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계는 부처와 마와의 치열한 싸움의 무대이다. 부처의 군세의 내부에서 비난하고 서로 물고 늘어지는 것은 13/ ‘성자(城者)로서 성을 파괴하는 자’로 되어 버린다. 싸워야 할 적은 ‘마군(魔軍)’이다. 그것은 잊고 묘법을 흉중에 품은 동지를 함부로 방법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NSA 청년연수회 1990. 2. 20

대성인은「아무리 법화경을 믿으신다 해도 방법이 있으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리라. 13/ () 천통에 게의 발 하나 넣음과 같도다.(어서 1056)

 

- 아무리 법화경을 믿고 있어도 방법이 있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그것은 천통의 옻에 게의 다리를 하나 넣어서, 옻을 소용없게 하고 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진지하게, 착실하게 신심을 하고 있는 듯 해도, 방법이 있으면 공덕을 없애고 만다. 그것은 아주 소량의 청산가리 때문에 금방 죽고 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악의 인을 만드는 것으로서, 십사비방을 드시고 있는데, 그 중에 경선. 증선. 질선. 한선이 있다.

신심하고 있는 사람을 경시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원망하는 것이 그에 해당한다.

14/ 열심히 이 만큼 신심을 하고 있는데 공덕을 느낄 수 없다는 경우가 있다. 그 때는 이 네 가지의 비방이 있는가. 없는가를 자기에게 물어 봐 주시기 바란다. 경선. 증선. 질선. 한선의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공덕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동지에게 대해서도 14/ 말해야 할 것을 명확히 말해 간다는 것은 자유이고,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14/ 상대방을 생각해서 엄하게 말하는 것과 미워하는 마음이나 원망의 말은 같지가 않다. 그 점을 깊이깊이 판별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본존 슬하에 모여, 광선유포로 전진하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가 불자이며, 묘법의 가족이다. 그러므로 서로가 존경하고, 신뢰하고, 격려하면서 이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 주시기 바란다. 그 사람에야말로 어본존의 공덕과 제천의 가호는 더한층 늘어 간다는 점을 확신해 주시기 바란다.

 

12

♠법화경 법사품 제십(法華經 法師品 第十)

『만약 후세에 있어서 이 경()을 수지(受持)하는 자가 있으면 내(釋尊)가 그 자를 보내어 인간 속에 있게 하고 여래의 일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일겁(一劫)이란 긴 시간 항상 불선(不善)의 마음을 품고 표면으로 나타내어 부처를 매도한다면 무량의 중죄(重罪)를 얻을 것이다. 더욱이 이 법화경을 독송(讀誦)하여 수지하는 자가 있어서 그 사람에게 단시간이라도 악언(惡言)을 가하면 그 죄는 또한 그 이상이 될 것이다』

 

13

(79회 본부간부회·제6회 도호쿠(東北) 총회 1994 8)

광포헌신의 학회원 - 14/ ‘정법의 사람을 부처와 같이 존경하라’ 법화경의 최후에 설해진 것

 

노고를 마다 않고 몸을 아끼지 않으며 학회원을 위해 광선유포를 위해 진력하는 임원 여러분의 헌신적 행동. 그것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가. 불자를 지키고 소중히 하는 행동 속에 법화경의 정수가 있고, 대성인 불법의 근본정신이 맥동 하고 있다.

석존이 법화경 28품에서 가장 최후에 설한 것도 그야말로 이 점이었다. 그것은 ‘이 경을 수지 하는 사람을 참으로 부처와 같이 존경하시오’라는 것이다.

즉 「보현보살권발품」 제28의 가장 최후에서 석존은 보현보살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14/ 만약 이 경전을 수지 하는 자를 보면 마땅히 일어나 멀리 맞이해야 할 것, 응당 부처를 존경하듯이 해야 하느니라」(묘법연화경병개결 672)

 

- 만약 이 묘법을 수지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일어나 멀리까지 맞이하러 나가야 하는 것은 마치 부처를 존경하듯이 소중히 하시오 - 라고.

이것이 석존이 법화경에서 최후의 최후에 설한 가르침이다. 또 그것은 우리들이 몸으로써 실천해 온 경문이다. 불자인 회원 분들을 최대로 소중히 하고 진심을 다해 봉사한다. 그것은 학회리더의 근본자세가 아니면 안 된다. 그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학회는 이만큼 발전해 왔다. ‘회원제일’의 정신은 영원히 불변이다.

대성인의 「어의구전」에는 이 보현품의 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품()의 때 최상제일(最上第一)의 상전(相傳)이 있다. 석존 팔개년(八箇年)의 법화경을 팔자(八字)에 담아서 말대(末代)의 중생에게 물려주시었으니, 팔자란 당기원영 당여경불(當起遠迎 當如敬佛) 이란 문()이니라. 이 문()까지로써 경()은 끝나는데」(어서 781)

 

- 보현품 제28의 속에는 최상제일의 상전이 있다. 즉 석존이 8년간에 걸쳐 설한 법화경을 8문자에 담아 말법의 중생에게 물려주신 것이다. 8문자란 15/ ‘당기원영 당여경불’ (마땅히 일어나 멀리 맞이해야 할 것, 응당 부처를 존경하듯이 해야 하느니라)의 문이다. 이 경문을 마지막으로 법화경의 설법은 끝나는 것이다. -

 

「당()의 자는 미래(未來)이며 당기원영이란 반드시 법화경의 행자(行者)를 부처와 같이 공경(恭敬)할지어다. 라고 하는 경문(經文)이니라」(어서 781) 

 

- ‘당’이라는 글자는 미래를 말한다. ‘당기원영’이란 (말법에 있어서) 반드시 부처와 같이 법화경의 행자를 공경해 가시오. 라는 경문이다 - 라고.

15/ 묘법을 수지한 사람을 최대로 존경하고 소중히 할 것. 그 가르침이야말로 ‘최상 제일의 상전(相傳)’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마땅히’란 ‘미래’ 결국 말법인 ‘지금’의 때라는 말씀이다. 또 ‘법화경의 행자’란 별해서는 대성인이고, 총해서는 말법광선유포에 살아가는 대성인 문하라고 배견된다.

‘불자’를 존경하라. ‘인간’을 존경하라. 여기에 최제일의 ‘상전’이 있다. - 석존 그리고 대성인의 불법에 맥맥히 통하는 ‘인간주의’ ‘인간애’에 우리들은 깊이 감동한다. 감사한다. 진심으로 납득한다. 그 가르침대로 영원히 나아갈 것을 서로 맹세하고자 한다.

반대로 15/ 광포의 실천에 면려하는 학회원을 노예처럼 경멸하고, 학대하는 언동은 불법에 대한, 이 ‘상전’에 대한 근본적인 위배이다. 대성인 그리고 석존에 대한 ‘사적대’이고 그 죄는 무한하다고 단언해 두고자 한다.

이미 종문에는 이 인간존중의 ‘상전’이 단절되고 말았다. 있는 것은 ‘인간을 경천(=멸시하고, 싫어함)한다’고 하는 ‘참성증상만의 상전’뿐이다.

15/ 정의는 정의, 사악은 사악이라고 명쾌하게 잘라 말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법의 정사(正邪)’라는 일점을 애매하게 해 버리면 자신도 타인도 불행의 길로 전락시키고 말기 때문이다.

 

♧ ‘대성인 직결’의 대도를 영원히

‘생명’은 영원하다. ‘인류’도 영원하다. ‘대성인의 불법’도 영원하며 ‘광선유포’의 전진도 또 영원하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눈앞의 작은 일에 우왕좌왕하거나 변천해 가는 사람의 마음에 우고좌면(右顧左眄) 할 필요도 전혀 없다.

‘대성인 직결’의 대도를 나아가는 창가학회의 ‘올바름’은 어서에 비추어 경문에 비추어 명백하다. 16/ ‘진실’은 때가 지나면 지날수록 명료해져 간다. 우리들은 ‘영원한 승리자’인 것이다. 머나먼 ‘미래’를 지향하면서 우리 학회는 엄연히 ‘이 길’을 나아갈 것이다.(대박수)

 

♧ 닛코상인의 유계

또한 제2조 닛코 상인도 「유계치문」속에서 이 보현품의 문을 인용하시고 있다.

「신경법중(身輕法重)의 행자에 있어서는 하열(下劣)의 법사(法師)라 할지라도 당여경불(當如敬佛)의 도리에 따라서 신경(信敬)을 해야 할 것」(어서 1618)

 

- 신경법중 (=몸을 가볍게, 법을 중히 한다)의 행자에 대해서는 설령 그 사람이 신분이나 지위가 아래인 열등한 법사일지라도, ‘마땅히 부처를 공경하듯이 해야 하느니라’ 라는 도리대로, 믿고 존경해 가야 한다. - 라고.

16/ 자신의 몸을 던져 광선유포에 헌신해 가는 행동의 사람은 입장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존경해 가시오. 라는 말씀이다. 정말로 중대한 유계이시다. 이 말씀대로 신경법중으로 대성인의 불법을 행하고 넓히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우리들 학회원이다.(대박수) 학회원을 부처와 같이 소중히 하라는 유계인 것이다.

 

♧ 인간성의 승리를 향해 사자는 싸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락을 함께 해 가는 진실한 동지애. 이 아름다운 창가의 스크럼에야말로 대성인의 정신이 맥맥히 흘러가고 있다. 대성인의 불법의 ‘정통 중의 정통’의 실증이 있다. 거기에 무량의 복덕이 빛나 가는 것을 강하게, 강하게 확신하기 바란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 순진하고 선량한 ‘민중의 모임’을 파괴하려고 하는 ‘극악’의 세력을 우리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위대한 사자는 드디어 일어섰다. 울부짖고 울부짖는다. 싸우고 싸운다. ‘정의의 승리’ ‘인간성의 승리’ - 그것을 사실상에서 증명하는 날까지.

 

14

『「마땅히 일어나 멀리 마중하여 응당 부처를 공경(恭敬)하듯이 하라」는 도리(道理)이므로 부처와 같이 서로 존경(尊敬)할지어다.(마쓰노전답서 1383)

 

<통해>

“마땅히 마음으로부터 예절을 다하여 멀리서부터 마중 나와 부처를 공경하듯이 하라”는 경()의 도리이므로 불법을 가진 자는 부처를 모시는 것처럼 서로 존경해야 할 것이다.

 

《강의록 중에서》

어떠한 귀축(鬼畜)일지라도 법화경의 일구(一句) 일게(一偈)를 설하는 자는 “마땅히 일어나 멀리 마중하여 응당 부처를 공경하듯이 하라” 는 도리이므로 부처와 같이 서로 존경할 지어다. 예를 들면 보탑품의 때에 석가 다보와 같이 할지어다.

 

비록 귀축이라고 해도 일구 일게라도 법화경을 설하는 자에 대해서는 보현보살권발품 제28(普賢菩薩勸發品第28)에 있는 「당기원영당여경불(當起遠迎當如敬佛)」의 문장대로 서로 공경해야 한다. 그것은 보탑품에 있는 석가·다보가 서로 존경하여 설법을 도와주었듯이 해야 할 것이다.

“당기원영 당여경불”이란 삼대비법의 어본존을 수지하는 자는 즉 불신을 가지는 자 임으로 부처와 마찬가지로 공경해야 한다. 이것은 어떠한 시대가 되어도 불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의 마음에 새겨야 하는 기본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신앙하는데 있어서 후배에 대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 사람을 경멸하거나 비방한다면 부처를 경멸하여 비방하는 것과 같은 죄를 저지른 것이 된다.

닛코(日興) 유계치문(1617)에는 ‘신경법중(身輕法重)의 행자에 있어서는 하열의 법사라 할지라도, 당여경불의 도리에 따라서 신경(信敬)해야 할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사회적인 지위, 신분, 재산 등에 상관없이 신심을 강성이 하고 광선유포를 위해 진지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소중히 하고 공경해 가야 한다.

이 정신을 잃고 외견에 사로잡히며 신심을 강성이 하고 순수하게 하는 사람을 경멸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부처를 가벼이 여기는 것이며 대방법인 것을 알아야 한다. 어문 전체가 구도심을 호소하는 것과 함께 나아가 불법이 인간성을 기조로 하는 신뢰의 세계라는 원리를 설하시는 부분이다.

 

15

『이체동심(異體同心)이면 만사(萬事)를 이루고 동체이심(同體異心)이면 제사(諸事)가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이체동심사 1463)

 

<통해>

17/ 이체동심(異體同心)이면 만사(萬事)를 성취하고 이체동심(同體異心)이면 어떤 일도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

 

《강의록 중에서》

「이체동심이면 만사를 이루고」(이체동심사 1463)에서 나온 바와 같이, 사람이 모여서 하나의 일을 성취하려고 할 경우, 가장 중요한 이체동심에서, 이체(異體)라는 것은 십인십색이라고 하듯이, 얼굴 형태부터 성격, 취미 등, 사람 각각의 개성과 특질이 다른 것을 말하며, 또 사회적인 입장이나 경력 등이 다른, 별도라는 것이다.

동심(同心)이란 목적관이나 가치관, , 마음이라는 것을 같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체동심이란, 많은 사람이 각각의 개성, 특성을 가지면서 마음을 같게 하여 행동하는 모습이며 거기에는 개인으로는 다할 수 없는 위대한 힘이 발휘된다. 말하자면, 개인과 전체를 훌륭하게 조화시키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불법에서 강조되는 이체동심의 특징은 일체의 사람이 어본존에게 신심과 민중구제의 마음을 가지고 광선유포를 향한 실천을 해나가는 속에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 재능 등이 최대한 발휘되어가는 것에 본뜻이 있다. 즉 동심이 되는 동시에 이체도 소중히 하게 되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동체이심은 제사가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동체이심이란 보기에는 한 몸으로 보여도,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 외면은 하나의 집합체에 소속되고 단결해 가는 듯해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적관이 뿔뿔이, 모두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자신의 에고로 살아가는 것으로, 하는 일, 성취하는 일이 마구 엇갈리게 되는 것은 필정이며, 무엇도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일찍이 18/ 파시즘의 예에서 보면, 동체(同體)를 강요당하고 외견적, 형식적으로는 일체의 모습을 보여도 각인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고, 억압을 해서는 진실한 단결을 도모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심(異心)을 더욱 활발히 하는 것이 된다.

 

16

『하나의 마음이 되면 반드시 일을 성취한다.(이체동심사 1463)

 

<통해>

하나의 마음이면 반드시 일을 성취하는 것이다.

 

<강의록중에서>

「동체이심이면 제사가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는 것은 꼭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경우만이 아니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두 가지의 마음이 있거나 현혹이 생기는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무언가 일을 성취하려는 경우 그것을 할까, 말까라고 주저하거나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 하는 마음이 있으면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는 없다.

우선 목표를 명확하게 하여 어떻게 달성해 나갈 것인지, 확고한 방향성을 확립해야 그것에 전력을 경주할 수 있는 것이다. 여하튼 18/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두 가지 마음이 있다면 일을 성취할 수 없으며(박쥐신심) 또 많은 사람이라도 마음을 하나로 한다면 반드시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씀은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도 사회의 공동생활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침이라고 볼 수 있다.

 

17

『총()하여 日蓮의 제자(第子)단나(檀那)등은 자타피차(自他彼此)라는 마음 없이 수어(水魚)라고 생각을 해서 18/ 이체동심이 되어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바를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혈맥(血脈)이라고 하느니라.(SGI지도 안 받으면 이체이심) 더구나 지금 日蓮이 홍통하는 바의 구극은 이것이니라. 만약 그렇다면 광선유포의 대원(大願)도 이루어질 것이니라. 더군다나 日蓮의 제자 중에 이체이심(異體異心)의 자가 있다면 예컨대 성()안에 있는 자가 성을 파괴(破壞)하는 것과 같으니라.(생사일대사혈맥초 1337)

 

<통해>

원래 日蓮의 제자 단나가 자기와 타인, 이것저것 격의(隔意)없이 물과 물고기라는 생각으로 이체동심(異體同心)으로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것을 생사일대사의 혈맥이라고 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日蓮이 홍통하는 법의 간요(肝要)는 이것이다. 만약 제자 단나가 이 뜻을 명심해서 지켜 나아간다면 광선유포의 대원도 성취할 것이다. 이에 반()해서 日蓮의 제자 중에 이체이심(異體異心)의 자가 있으면 그것은 예를 들면 성()안에 있는 자가 성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강의록 중에서》

여기는 이체동심의 인간관계 속에, 총해서의 생사일대사의 혈맥이 유통되는 것을 시사하신 곳이며 널리 일체중생이 성불되는 혈맥을 잇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자세를 밝히신 어문이시다.

이 어문에 관련하여 이체동심의 자세에 대하여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체동심의 화합승단(和合僧團)이 되어야만 비로소 총()하여 19/ 생사일대사의 혈맥이 흘러 통한다는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체동심의 원리에서 중요한 점은 첫째, 19/ 이체(異體)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나 입장, 특성을 최대한으로 존중하고, 그 당체를 빛내는 것이 日蓮대성인의 불법인 것입니다.

 

「어의구전」에는, 19/ 「앵매도리(櫻梅桃李)의 각기의 당체를 고치지 아니하고 무작삼신(無作三身)이라고 개현(開見)하니라」(어서78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자체현조(自體顯照)의 모습으로써, 광선유포에 싸워나가는 속에 자기의 인간혁명의 발자취가 있는 것입니다. 개성의 면에서나, 재능의 면에서도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자체(自體)를 현조(顯照)하면서 광포라고 하는, 신세기의 산맥을 향하여 가는 데에 비로소 총체적인 변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 사람 한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체동심의 두 번째 원리이며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대성인은 「자타피차의 마음 없이 수어의 마음으로」라는 말씀이십니다. 이것은 자기라는 존재,남이라는 존재 또 이것 저것이라는 갖가지 입장이 있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을 부정(否定)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거기에 인간의 마음이 교류가 없고 각자가 19/ 자기의 일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감정만을 근본으로 행동하는 일입니다. 그러한 자세에서는 인간관계가 산산조각이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인간집단에서는 이미 어떠한 혈맥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수어(水魚)의 마음」이란, 물고기는 물고기 물은 물로서 각각 다른 존재이면서,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잠시도 살아갈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가 다양한 인간관계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소중히 하는 일입니다.

()이란, 자신을 둘러싼 인간관계이며, ()란 자기 자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에 익숙하게 지내듯이, 이체동심의 화합승에 친근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모습이 「수어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수어의 마음」을 이루어 나가는 근원, 바꾸어 말하면 이체동심의 20/ “동심”이란, 어본존을 믿는 마음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서에 「日蓮과 동의(同意)」라면(어서1360), 또「우리들 편이 이진(二陳) 삼진(三陳) 줄을 이어서」라고 말씀 하셨듯이, 광선유포의 대 목적을 나의 사명으로 하는 일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광선유포의 대원도 이루어질 것이니라.」의 어문은 그 이체동심의 단결이 있는 곳에, 반드시 광선유포는 성취된다는 단언(斷言)이십니다.

 

이체동심의 실천이 없이 그저 때만 기다리고 있다든가, 입으로만 외치고 있어도 광선유포의 실현은 없는 것입니다. 광선유포를 스스로의 사명으로 하여 「여래의 소견(所遣)으로서 여래의 사()를 행하는 사람들의 공덕은 바로 「부처의 지혜로서도 헤아리기 어려운(어서1359)(경문(經文) 그대로임은 틀림이 없습니다.(20/ 부처의 지혜로도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은 무엇일까? 사제불이입니다./ 그것이 제법실상초의 주제입니다.)

 

이에 반해서 日蓮의 제자 중에…… 이하의 어문은 20/ 이체이심(異體異心)의 자는 사자신중의 벌레이며 최대의 적이라는 말씀이십니다. 이는 이체동심의 단결을 문란케 하고, 생사일대사의 혈맥을 끊어버리기 때문에 그 죄는 큰 것입니다. 불법에서 말한다면 일왕(一往)은 오역죄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파화합승의 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재왕(再往) 이것을 논하면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무거운 「비방정법」의 죄에 해당되는 셈입니다. 20/ 왜냐하면 불법의 근원인 생사일대사혈맥 즉 묘호렌게쿄를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심(異心)」이란 근본은 日蓮대성인의 뜻에 배반 되는 것이 됩니다만, 누구도 처음부터 대성인을 배반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심에 빠져 버리는가? 20/ 이심(異心)의 본원은 아집(我執)이며, 자기의 이익, 감정, 만심(慢心)을 중심으로 한 생활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감정, 교만을 중심으로 하는 방법으로 나아가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체이심에 떨어져 불평불만이나 원질이 소용돌이치게 된다.

결국은 ‘성자로서 성을 파괴하는’ 대원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20/ 석존 재세 시대의 제바달다, 日蓮대성인 재세 시대의 니치교(日行), 대성인 멸후의 닛쇼(日昭)등의 오노승이 그 대표적 예이다.

 

<참고:사이토 교학부장 강의중에서>

4 21() 생사일대사혈맥초 제2회 강의

여기서는 생사일대사혈맥의 세번째 의의에 대해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이체동심의 화합승 중에서 단결하여 신심에 면려해 가는 것이 생사일대사혈맥이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이체동심이 아니면(SGI지도 없이는) 성불의 법인 묘호렌게쿄는 널리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20/ ‘자타피차의 마음’이란 자신과 타인을 차별하여, 단절을 만드는 마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승려와 재가신도를 차별하는 마음, 혹은 자신의 이해만을 생각하여 타인의 일을 돌아보지 않는 에고이즘의 마음 등이 이것에 해당합니다.

 

‘자타피차의 마음 없이’란 그러한 차별의 마음을 없애고 평등·일체의 마음에 선다는 것입니다. 신심의 마음을 서로 존중하고, 서로 격려해 가는 것입니다.

21/ ‘수어라는 생각’이란 조직 속에서 각자 각자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서 서로 존중해 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주변의 여러 사람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주위 사람들을 소중히 해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화합승을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고 소중히 해가는 것입니다.

21/ ‘이체동심’의 ‘이체’란 각각의 입장이나 특징·재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서로 존중해 간다는 것입니다. 단결이라는 것은 각자의 차이를 없앤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개성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다양성이 전체로서 크나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 열쇠가 ‘동심’입니다. 이것은 어본존을 믿는 마음, 광선유포를 향해 투쟁하는 마음이 같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멋대로의 아견이나 감정을 자재하며 광선유포라는 대 목적 아래 마음을 하나로 합하여 전진해 가는 것이 이체동심입니다.

 

21/ 혼자는 아견이 되기 때문에, 올바른 신심은 불가능합니다. 조직을 떠나 생사일대사의 혈맥은 없는 것입니다. 도다 선생님이 “학회의 조직은 도다의 목숨보다도 소중하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런 까닭에서입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문하가 21/ 단결해 가는 것이 당신의 홍통의 결론이며, 그 단결이 있다면 광선유포의 대원도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SGI의 조직을 지키고 구축해 가는 것이 광선유포의 길에 통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SGI의 조직을 교란하는 일은 광선유포를 저해하는 대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대성인의 불법은 말법만년의 전 인류를 위해 남겨진 불법이며, 그 계승도 광선유포를 추진하는 조직인 화합승이라는 공적인 전체의 입장에서 이루어집니다.

법주라는 것은 본래, 화합승의 대표로서 화합승을 총괄하고, 광선유포를 추진해 가는 존재였습니다. 결코 법주 일인이 불법을 독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2조 닛코상인은 법주라 해도 불법의 원칙에 위배하여 자기 멋대로의 주장을 말한다면, 그러한 법주를 등용해서는 안 된다고 유언하시고 있습니다. 장래에는 당치도 않은 법주가 나오는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에게는 조심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지금 닛코상인이 예견하신 그대로의 사태가 되었습니다.

 

SGI의 회합에 참석하면 아무리 작은 회합이라도 동지와 만나는 것에 의해 자신도 열심히 신심에 면려해 가자는 촉발을 받게 됩니다. SGI의 조직에는 신심을 격려하고 사람들을 올바른 인생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SGI가 日蓮 대성인으로부터의 생사일대사혈맥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SGI의 조직에서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도다 선생님도 학회를 떠나서 행복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창가학회·SGI와 함께 걸어가는 곳에 올바른 신심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대성인의 문하라고 자칭하면서 불법을 계승하는 화합승을 파괴하는 자에 대해, 대성인은 성을 지켜야만 할 사람이 내부에서부터 성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22/ ‘이체이심의 자’라는 것은 광포의 목적을 잊고, 자신의 일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대성인의 가르침이 아닌 자신의 이해나 아견을 중심으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실로 지금의 닛켄 및 닛켄종에 해당됩니다. 대성인의 마음에 위배하고 있는 그들은 불법을 내부에서 파괴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회는 닛켄종을 엄하게 파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성인은 이체동심이면 어떠한 싸움도 이길 수 있지만, 이체이심의 자는 아무리 많이 있어도 어떠한 일도 성취하지 못하고 반드시 멸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SGI 속에서 이체동심을 잊고 서로 다투면 기뻐하는 것은 닛켄종입니다. 또 어떠한 이유가 있든 동지가 서로 대립하여 싸우는 것은 결국 신심을 파괴하고 공덕을 소멸시키고 맙니다.

22/ 서로 다투는 것은 말법이라는 시대의 특징입니다. 우리들은 말법의 오탁한 생명에 더럽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신심이라는 청정한 생명을 불러일으켜, 다투는 마음을 뿌리쳐 가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신심이라는 청정한 생명을 잊으면, 이체동심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반대로 이체동심이 있으면 신심은 더욱 증폭되어 깊어지고, 공덕도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이체동심은 “지금 日蓮이 홍통하는 바의 구극”(53의 분열은 극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성인의 홍통의 결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중요한 이체동심을 결코 소홀히 하는 일 없이 전진해 갑시다.

 

18

『日蓮의 동류(同類)는 이체동심(異體同心)이기에, 사람들은 적지만 대사(大事)를 성취하여 반드시 법화경이 넓혀지리라고 생각하오. ()은 많아도 일선(一善)에는 이길 수 없으니』(이체동심사 1463)

 

<통해>

日蓮의 일문(一門)은 이체동심이므로 사람들은 적지만 대사(大事)를 성취하여 반드시 법화경이 넓혀지리라고 생각한다. ()은 많아도 일선(一善)에는 이길 수 없다.

 

<참고:사이토 교학부장 강의중에서>

6월도 법련 지구좌담회를 위하여

<일본국 사람들은 다수(多數)일지라도 체동이심(體同異心)이기에 제사(諸事)가 이루어지기 어렵고, 日蓮의 동류(同類)는 이체동심(異體同心)이기에 사람들은 적지만 대사(大事)를 성취(成就)하여 반드시 법화경(法華經)이 넓혀지리라고 생각하오. ()은 많아도 일선(一善)에는 이길 수 없으니 비유컨대 많은 불이 모였어도 일수(一水)에는 꺼지느니라, 이 일문(一門)도 또한 이와 같도다.> (어서전집 1463 5~7)

 

◎박해자는 체동이심

처음에 <일본국 사람들은 다수일지라도 체동이심이기에 제사가 이루어지기 어렵고>라고 있습니다.

대성인은 박해자들을 <일본국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가하면, 지금까지 대성인을 박해해 온 사람들이 상하에 이르는 모든 계층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박해자들의 본질을 [체동이심]이라고 간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성인이 지금까지 박해를 극복해 오신 경험을 바탕으로 이와 같이 본질을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박해를 가하고 있을 때는 보기에는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각각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것에 불과하며, 이상이나 목적관이 같기 때문에 모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가 일치하지 않으면, 바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버립니다. 박해하기 위해서, 보기에는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체동]이라 하시고, 그러나 본질은 뿔뿔이 흩어져 있기에 [이심]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체동이심]의 연대로는 결국 무엇도 성취할 수 없다고 간파하고 계십니다. 이 어문의 앞부분에서 악정으로 유명한 은의 주왕의 군세는 70만 기나 있었지만 체동이심·동체이심이었기 때문에 단지 800명인 주의 무왕의 군세에 패배했다는 이야기를 그 예로서 들고 계십니다.

 

◎이체동심이 승리의 열쇠

그리고 그 박해자가 체동이심인 것에 대해, 이번엔 대성인의 일문은 이체동심이기에 사람의 수는 적어도 반드시 커다란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계십니다.

[이체동심] [이체], 각자의 입장과 특질, 재능의 차이는 있어도, 그것을 서로가 존중해 가는 것입니다.

 

단결이라는 것은 (자주 잘못 인식되어 지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각자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개성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지역에 따라 관습과 문화가 다른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성이 전체적으로 힘을 합하여 융합하여 간다면 커다란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체동심의 ‘이체’를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각각의 특징이나 개성을 살려가면서 서로가 하나가 되어 가는 그 열쇠가 바로 ‘동심’입니다.

 

이것은 어본존을 믿는 마음이며, 광선유포를 향해 투쟁하는 마음이 같다는 것으로 궁극적인 ‘동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크게 말하면 목적과 이상을 같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말하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따라서 자기 멋 대로인 아견이나 감정을 억제하고 광선유포라는 대 목적에 마음을 합하여 전진하는 것이 ‘이체동심’입니다.

 

여기서 이케다선생님의 지도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을 행복하게 해 가자. 지역을 사이좋게 해 가자. 그리고 나라를 번영시키고 나아가 세계를 평화로 해 가자. 그러한 기원과 행동을 계속해 가는 생명 속에 “광선유포의 신심”이 맥동치는 것이다. 이 “광선유포의 신심”을 전 일본과 전 세계에 넓혀온 불의불칙의 단체가 창가학회인 것이다.]

 

지금 선생님의 지도를 읽어 보면, 항상 ‘맺어나가자, 결합시켜나가자’라는 그러한 리듬을 느끼지 않으셨는지요. 어디를 보더라도 ‘분단하자. 분열하여 대립하자’는 방향성은 하나도 없습니다.

‘묘법’이라는 것은 원래 모든 것을 포함시켜 가는 법입니다. 모든 것을 ‘맺어가자’라는 것이 묘법의 힘을 나타내는 리듬입니다. ‘분단하자. 대립하자’는 것, 이것은 불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불법은 아닙니다.

 

그 전형적인 모습이 닛켄종입니다. 24/ ‘창가학회를 분단하자. 파괴하자’ ‘광선유포를 분열시키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닛켄종 입니다. 불법의 이름을 빌린 외도입니다.

이와 같이 24/ 선생님의 발상이란 항상 ‘맺어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조직을 운영할 때에도 세계를 향한 발언을 하실 때에도 항상 이 발상이 선생님의 일관된 발상이라고 느꼈습니다.

제목을 올리고 생명력을 풍부하게 한다면 이것은 가능하게 됩니다. 생명력이 약해지면 아무리 해도 24/ ‘나 한 사람이 좋으면 된다.’는 분단의 방향으로 인간의 생활도 행동도 움직이게 됩니다.

 

어쨌든 광선유포란, 방금 선생님의 스피치 속에도 있었습니다만 불의불칙입니다. 부처의 마음으로 본 것이 광선유포입니다. ‘모두를 성불시키자’는 그 마음입니다. 그 광선유포의 투쟁 속에서 ‘분단시키자’는 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자주 말씀하고 계십니다. 24/ 선은 결합, 악은 분단이라고.(53은 분단된 상태, 분단은 악이다.) 이것이 다음의 일절과 이어집니다.

 

◎선과 악

<()은 많아도 일선(一善)에는 이길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이란 결합시켜가는 것이며, 악이란 분단시켜 가는 것입니다. 대단히 간단한 선악의 이론입니다. 하지만 세계에서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방금 전 선생님이 말씀하신 “광선유포의 신심”도 크게 말하면 ‘넓히고 결합시켜가는 마음’ 이것이 광선유포의 신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행복도 그리고 세계 평화도 오직 결합해 가는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분단해 가는 마음은 결국은 악과 불행을 낳을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자신이 정의라고 하여도 분단의 방향으로 가면 반드시 악을 낳게 되는 것이다. , 25/ 자신의 이해, 감정을 중심으로 하는 박해자들은 결국 에고이스트이며 차별주의자이며 파괴자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악세의 격류에 휩쓸려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분단주의의 악인의 말로입니다.

 

지난달에 헤이노사에몬노조의 말로에 대하여 공부를 했습니다만, 그것이 구체적인 예입니다. 반대로 광선유포의 신심은 최고의 결합주의 입니다. 따라서 최고의 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선유포의 신심으로 하나로 결합된 모습을 대성인은 [일선]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심의 단결이 있다면 어떠한 악에도 절대로 지지 않는다,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상으로 본초의 해설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만,

 

◎이체동심에 대한 대성인의 교시를 몇 가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① 본초에서 주의 무왕과 은의 주왕의 싸움을 예로 들고 있듯이 무엇보다도 이체동심이 ‘승리의 열쇠’입니다.

② 또 대성인은 이체동심은 ‘日蓮의 홍통의 결론’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생사일대사혈맥초에 <日蓮이 홍통하는 바의 구극은 이것이니라. 만약 그렇다면 광선유포의 대원도 이루어질 것이니라.>(어서 1337)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대성인이 [결론]이라고 말할 정도로 광선유포에 있어서 이체동심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심의 연대, 혈맥을 실제로 넓혀가는 오직 하나의 길이 이체동심 입니다. 또 실제로 넓힌다는 것은, 조직 또는 지역에 신심을 넓히기 위한 진짜의 힘이 되는 것은 이체동심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체동심의 연대가 있다면 반대로 그 속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심은 더욱더 깊어지고 그 공덕도 배증하게 됩니다. 이것에 대한 특별한 어문은 없습니다만, 생사일대사혈맥초 등을 읽고 느낀 이체동심의 의의가 아닐까 합니다.

 

4번째는, 생사일대사혈맥초에 <수어라고 생각을 해서>이라고 있듯이 이체동심을 만드는 것은 화합승(조직)을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해 가는 마음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조직 속에서 각각이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서 존경해 가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자타피차의 마음>을 배제해 가시오, 라고 대성인은 훈계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25/ 자신과 타인을 차별하고 단절을 만드는 마음입니다. 방금 전의 분단주의 입니다.

예를 들어 25/ 승려와 재가신도는 상하의 차별이 있다고 명확하게 이야기 한 것은 닛켄 입니다. 그것은 분단주의이며 자타피차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는 저희들 속에도 25/ 자신의 이해만을 생각하여 타인의 일을 돌보지 않는, 에고이즘의 마음이 자타피차에 해당합니다. 이상이 제 나름대로 느낀 이체동심 어서의 대성인의 교시입니다. 물론 이 4가지에 한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심]을 훈계하심

마지막으로 이심을 훈계한 부분입니다. 대성인의 문하라고 말하면서 광선유포의 신심의 혈맥이 통하는 화합승(조직)을 파괴하는 자. 그자에 대해서 대성인은 [이체이심의 자]라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성을 지켜야 할 자가 성안에서 성을 파괴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강하게 훈계하고 계십니다.

 

현대의 광선유포라는 크나큰 흐름에서 본다면 26/ 닛켄종의 움직임이야 말로 실로 이체이심 입니다. 모든 것을 결합시켜 가자는 창가학회·SGI가 만들어 온 흐름에 따라 올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승려중심의 단체를 만들자, 승려가 먹을 만큼이면 된다는 종문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종파는 결코 日蓮정종 아니기에 닛켄종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광포의 목적을 잊어버리면 대성인의 제자도 닛코상인의 제자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회는 닛켄종을 엄하게 가책하고 있는 것이며 이제부터도 방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또한 이체이심의 자를 엄하게 파절 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지금 SGI 속에서 서로가 이체동심을 잊어버리고 다투게 된다면 기뻐하는 것은 닛켄종 뿐입니다. 어떠한 이유가 있어도 동지가 서로 대립하고 싸우는 것은 결국은 신심을 파괴하고 공덕을 멸하게 됩니다.

 

서로 다투는 것은 확실히 말법시대의 특징입니다. 경전도 대성인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말법의 악세의 생명에 오염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심이라는 청정한 생명을 일으켜서 서로 다투는 마음을 떨쳐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용기입니다.

신심이라는 청정한 생명을 잊어버린다면 이체동심도 모르게 됩니다. 반대로 이체동심이 있다면 이번엔 신심은 더욱더 깊어지고 공덕도 점점 나타나게 됩니다. 아무쪼록 신심근본으로 이체동심의 전진을 하고자 합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