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란 인생에 대한 태도
진짜힘드네/ 저는 SGI 의 가르침은 많이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고개 숙여 가르침을 청합니다.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인 것처럼 착각하여, 피해의식을 가지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습니다. 어떤 가르침을 주는 게 좋을까요? SGI 의 교학에 의거한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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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I 교학에 의거한 조언을 말씀하셨으니,
이케다 SGI회장의 “어서의 세계”에 있는 부처의 삶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성인께서는 “받기는 쉽고 가지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성불(成佛)은 가지는 데 있으며”(어서 1136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숙고하여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신심하시는 귀하의 부인을 존경합니다.
● 종교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를 가르치는 것
토인비박사는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종교는 인생에 대한 태도라는 의미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 신비로움과 그 속에서 인간이 지닌 역할의 어려움에 관한 근본 문제에 정신적으로 만족스러운 해답은 밝힘으로써
또는 이 우주 속의 삶에 실제적인 잘못을 가르쳐 깨우치게 해 줌으로써 인생의 어려움을 대처하게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종교는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인생은 변화의 연속입니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생로병사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영원한 과제입니다.
대문호 위고는 “인간의 생활에는 가장 행복한 것이라도 그 깊은 곳에는 항상 기쁨보다도 많은 슬픔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실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엄한 현실 속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 보다 멋지게 살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바라며 행동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 그런 바램이 있었기에 종교가 탄생한 것
그 인간의 바램에 대한 해답이 종교입니다. 그런 바램이 있었기에 종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인간의 바램에 대한 니치렌대성인의 해답은 무엇인가? 인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르쳐 주시고 있는가?
그 해답은 한마디로 일생성불입니다.
일생 동안에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일생성불입니다. 그래서 대성인께서는 벼에는 조생종과 만생종이라는 종류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일년 내에 반드시 수확하듯이 사람도 빠르거나 늦는 차이는 있을지라도 일생 동안에 반드시 불계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다고 설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나의 일생은 부처가 되기 위해 있다는 뜻입니다. 일생성불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생 동안에 현실적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이 말은 실로 충격적인 가르침입니다. 이 말을 되새기면 우리 인생의 의미가 한층 높아지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성불이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 어떤 삶이 되는가? 라는 물음이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 성불이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현대인에게는 부처가 된다는 말이 아마도 현실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부처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사고방식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이 부처가 된다고 하면 어이 없어 하거나 화를 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단 불계만은 나타내기 어려운데”(어서 241쪽)입니다.
현대인에게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현대인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를 항상 생각하고 도전하지 않으면 광선유포는 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알고 이야기할 수 있는 말이 생기면 광포의 속도는 더욱 빨라 집니다. 그것이 교학이 지닌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 학회에는 “부처란 생명이다” 라는 도다 선생님의 오달에 따른 현대적으로 전개되는 교학의 전통이 있습니다.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학회원의 연찬과 실천 그리고 실증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 학회원들에게 성불의 본보기는 말할 것도 없이 대성인의 행동 속에 있습니다. 다쓰노구치 법난 때의 모습이나, 사도에서 보이신 의연한 모습이 바로 성불이라는 최고의 실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유배의 몸이지만 희열은 한량없도다
도다 선생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대성인께서는 개목초에서 “당세에 일본국에서 제일로 부한 자는 니치렌이로다”(어서 223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제법실상초에서도 “유배의 몸이지만 희열은 한량없도다”(어서1360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배자라고 사회에서 냉대받고 자연 환경이나 생활 환경도 최악인 목숨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일본에서 가장 부유한 자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중대한 일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지요.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소카대학교에서 유죄라는 형벌에 대해 강연하신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강연의 서두에 오스트리아의 작가인 츠바이크의 말을 소개하셨습니다.
“누가 일찍이 유죄를 찬탄하는 노래를 부른 자가 있었는가?
폭풍우 속에서 인간을 드높이고,
엄하게 억압받는 고독 속에서, 지친 혼의 힘을 다시 새로운 질서 속에 집중시키는, 이른바 운명을 만들어 내는 힘인 유죄를 노래한 자가 있었는가? <중략>
하지만 자연의 리듬은 이런 강제적인 단락을 바란다.
그렇다 해도 지옥의 밑바닥을 아는 자만이 삶의 전체를 인식하기 때문에, 버림을 받고 나서 비로소 사람은 그런 돌진하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유죄라는 지옥의 밑바닥을 체험한 사람은 오히려 인간의 생명에 내재해 있는 저력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저력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유죄까지도 찬탄하며 노래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츠바이크의 이 말은 대성인께서 말씀하신 개목초의 일절과도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성인께서는 현실적으로는 막부에게 박해를 받아 유배를 당하셨습니다.
● 고경 속에서도 자신보다 문하를, 자신보다 자신을 박해한 위정자의 행복을
보통사람이라면 회한이나 좌절, 혹은 사회에 대한 원망, 그리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한탄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성인께서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생 동안에 무시의 방법을 소멸하리니 기쁘도다. 아직 견문하지 못한 교주 석존을 시중듦이여, 원컨대 나를 해치는 국주 등을 최초로 이를 인도하리라. 나를 돕는 제자 등을 석존께 이를 고하리라”(어서 509쪽)
통해- 일생 동안 무시이래 쌓아 온 방법의 죄를 소멸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아직 만나 뵙지 못한 교주석존을 시중들 수 있다는 것이, 원하옵건대 나를 박해하는 국주들을 가장 먼저 인도하리라. 나를 돕는 제자들을 석존에게 보고하리라.
여기에 적고 있는 것은 환희이며, 감사이고, 자비입니다. 이 모든 것은 불계의 생명을 나타낸 것입니다. 대성인께서는 그런 고경 속에서도 자신보다 문하들을, 자신보다 박해한 위정자의 행복을 바랐습니다. 일체를 감싸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난을 참는다는 차원을 넘어,
인간이 이렇게 위대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가르쳐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맺음 말
기원 전 2세기경의 인도 시인인 마트리체타는 석존을 찬탄하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자신의 책임이든 아니든
당신은
모든 걱정에서 해방되었음에도
굳이 스스로
이 덧없는 세상에 출현하였도다.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에 동기 따위는 필요 없다.
사람을 사랑하는데 이유 따위는 필요 없다.
당신은
벗이 없는 사람의 벗이 되고
가족이 없는 사람의 가족이 되었다”
이 시를 들으면 내면에서 솟아나는 자비의 마음으로 이 사람을 격려하고, 저 사람을 분발시키려는 석존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부처란 내적인 숭고한 혼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며,
평생을 고난에 맞서 당당히 싸우면서 이상을 실현하고,
모두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니치렌 대성인이야말로 자비의 당체이십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종교에 대해 토라님께 말씀 드린 내용도 있습니다.
게시글 “(50) 차명호/ 토라, ‘21세기를 여는 대화’에서 종교는 가설”을 참고하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