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와 범부의 차이는 마음과 행동의 차이
진짜힘드네/ 저는 SGI 의 가르침은 많이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고개 숙여 가르침을 청합니다.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인 것처럼 착각하여, 피해의식을 가지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습니다. 어떤 가르침을 주는 게 좋을까요? SGI 의 교학에 의거한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부탁 드립니다. |
이번에는 범부와 부처의 차이는 마음과 행동의 차이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좀 어렵겠지만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 자신이 바뀌면 주위가 바뀐다는 근본원리입니다.
대성인께서는 “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며 수지한다 해도 만약 기심의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묘법이 아니라 추법이니라”(어서 383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책임입니다. 어느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묘법이 아닙니다.
자신이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는 근본원리입니다. 자신이 바뀐다는 것은 인간혁명이고, 세계가 바뀐다는 것은 입정안국입니다.
입정안국은 ‘정(正)을 세워 나라를 안온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의 마음 속에 정법(正法)을 확립시켜 감으로써 국가, 사회의 번영과 세계 평화를 구축해 가는 것이지요.
● 자신의 생명이 묘호렌게쿄의 당체
“묘호라고 부르고 렌게라고 읽을 때에는 나의 일념을 가리켜서 묘호렌게쿄라고 이름한다고 깊이 신심을 일으켜야 하느니라”(어서 383쪽) 이 말씀은 내가 묘호렌게쿄라고 정하라는 말씀입니다. 묘법은 만인의 고뇌를 제거하는 대양약입니다.
또 만인의 행복을 실현하는 커다란 보물창고입니다. 그 묘법을 근본으로 하여 묘법을 위해 철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묘법으로 물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에 묘법을 확고히 굳히는 것입니다.
묘법은 영원합니다. 또 만물의 근원입니다. 그 묘법과 일체인 생명을 각지하면, 자신도 영원한 존재가 되고 무한한 힘이 솟아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슨 일에도 자유자제입니다. 그것이 성불의 경애입니다.
거기에 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제목의 깊은 의의가 있습니다.
● 묘법을 믿고 묘법과 하나가 되면 무상의 자신이 영원한 존재로
묘법을 믿고 묘법과 하나가 되면 무상의 자신이 영원한 존재로 바뀝니다.
이 유한(有限)한 자신에게서 무한(無限)한 힘이 솟아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도 타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한 신심인 것입니다. 그 모습이 렌게(蓮華)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성불에 대해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성불이란 부처가 되다든가, 부처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성인의 법부즉극, 제법실상이라는 말을 순수하게 믿고, 이 몸 그대로 구원부터 영겁이라는 미래까지 부처라고 각오하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믿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믿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속 좁은 나 자신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하려면 나 자신의 작은 껍질을 탈피해야 합니다. 삼세 영원한 생명 오저의 일념에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묘법에 대한 신앙입니다.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결국은 ‘각오’입니다. ‘자신이 묘법이다!’라는 것에 눈 뜨는 것입니다. 삼세 영원히 묘법을 수지하고 끝까지 살아가자는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보통의 범부로 있다는 것은 비묘방편이며 실제로는 부처입니다. 우리 가슴에도 어본존은 걸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단에 있는 어본존을 우리 자신이라고 믿는 데에 이 신심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고뇌가 생기고 고난이 덮쳐옵니다. 그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감연히 맞서 극복해 갈 수 있는 힘이 개개인에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실제로 그 힘을 열어 나타낼 수 있느냐가 승리의 열쇠입니다.
● 그 열쇠가 묘법에 대한 ‘확신’
선생님께서는 “범부로서 고뇌에 가득 찬 현실에 맞서서 극복해 내기 때문에 묘법의 위대함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범부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명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고뇌에 져서 푸념을 늘어 놓는 것은 숙명에 속박된 모습입니다.
고난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면 사명으로 바뀝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일념으로 결정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적인 부처, 내적인 묘법에 눈을 드느냐 마느냐, 여기에 신심의 요체가 있습니다. 이것이 불법의 근본입니다. 일생성불초에서는 마음이 미혹한지 깨달았는지에 따라서 세계도 ‘ 정토인지, 예토인지’가 결정되며, 자신도 ‘중생인지, 부처인지’가 결정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의 마음이 더러워지면 국토도 더러워지고,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도 청정하다고 정명경에서 설하고 있듯이, 정토라 하고 예토라 함도 국토에 두 가지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의 선악에 따른다고 쓰여 있다.
중생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 같다.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한다. 비유컨대 잘 비치지 않는 거울도 닦으면 옥과 같이 빛나 보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명의 진실에 어두운 미혹의 마음은 잘 비치지 않는 나쁜 거울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닦으면 반드시 깨달음의 진실을 비추는 명경이 된다. 깊이 신심을 일으켜 밤낮으로 아침저녁으로 결코 게으름 없이 닦으시오. 어떻게 닦느냐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교라고 봉창하는 것을 닦는 다고 하느니라.”(통해, 어서 384쪽)
이것은 묘호렌게교가 자신의 생명을 다루는 근본 법이며, 이를 성불의 종자라 믿고 남묘호렌게교라고 부르는 신심과 실천하는 사람이 부처라는 말씀입니다.
● 범부도 부처도 인간으로서 그 본질에 차이는 없습니다.
“범부도 부처도 인간으로서 그 본질에 차이는 없습니다. 마음의 차이이고, 행동의 차이입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생명이 묘호렌게쿄의 당체라고 믿으라는 대성인의 당부이십니다.”
또 자신의 생명 밖에서 구한다면, 이미 묘법이 아니라 추법이 되고 만다는 경계입니다. 그 확신이야말로 묘호렌게쿄의 공덕을 개화할 수 있습니다. 묘호렌게쿄를 믿는 일심만이 불계의 생명으로 나타납니다.
“묘호렌게쿄에 대한 확신을 지속하는 것이 그대로 성불의 모습입니다. 묘호렌게쿄에 대한 확신을 지속하는 것이라는 인행(因行)이 그대로 성불의 모습입니다.” 수지즉관심입니다.
과덕(果德)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경전이나 불상으로 그려진 색상장엄(32상 80종호라는 초인적인 특징을 갖춘 장엄한 모습을 가진 부처)한 모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면에서 굳이 말한다면, 도다 선생님이 말씀하신’보다 큰 희망’이 거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 맺음 말
자신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성불에 대한 확신과
다음으로는 인생의 의미를 파악하고, 또 만인의 성불에 대한 확신이 보다 큰 희망입니다. ‘광선유포의 대원’이나 ‘자타 공히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거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 행복 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본존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묘호렌게교에 대한 믿음(확신)을 평생 관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타내셨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묘법을 수지 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동시에 광선유포를 위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대성인께서는 이것을 “법화홍통의 기치”(어서 1243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성인께서는 자신이 이 묘호렌게교라는 일법을 수지하시고 일생 동안 관철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생성불하기 위해 또 이 확신을 한 사람에게서 한 사람으로 넓혀 국토의 성불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어본존을 도현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