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불하면 죽음 앞에서도 환희 할 수 있나?
죽음의 사자인 내 모습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는 이 아이는?
오늘 TV뉴스를 보았습니다. 윤일병의 구타에 의한 살인과 이를 지켜보며 침묵했던 병사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며, 세상이 암울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 앞섭니다.
선생님께서는 “생도 환희 사도 환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은 멋진 것 같은데…… 죽음은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정말, 성불하면 죽음 앞에서도 환희 할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개념이 안 섭니다.
주위에서는 신앙이니까 대충 넘기라고 하지만, 맹신은 딱 질색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으면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질 않습니다. 저로서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딜레마(dilemma)에 빠져 신심의 진도가 안 나갑니다.
|
● 불교는 영원한 괴로움에서 해방되려는 속에서 태어난 가르침
맹신처럼 허망한 것도 없습니다.
귀하의 “성불하면 죽음 앞에서도 환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저도 오랫동안 고민했던 과제였습니다. 불법에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 있습니다.
이를 확인하며 같이 공부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사(生死)는 ‘살았다, 죽었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삶과 죽음을 되풀이하는 유전(流轉) 속에서 생기는 괴로움이나 미혹을 가리킵니다.
사실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인간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영원히 생사의 괴로움을 되풀이 해야 된다는 생각에 공허함마저 듭니다.
불교는 ‘어떻게 하면 영원히 되풀이 하는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길을 모색하는 속에서 태어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갖가지 불도수행을 하는 속에 생사의 괴로움에서 해방된 이상적인 경애를 얻을 수 있다고 설합니다.
그 이상적인 경애가 바로 열반입니다.
그리고 그 열반의 경애를 얻은 대표가 석존이며, 이를 의심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석존의 병과 죽음을 보고 ‘그는 정신적인 괴로움에서 해방되었지만, 병이나 죽음 등의 육체적인 괴로움에서는 해방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완전한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죽음으로써 생사를 초월한 이상적인 경애에 이른다’고 설하게 됩니다. 지금도 세간에서는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번뇌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던 소승교의 ‘회신멸지’ 사상과도 통하는 생각입니다.
‘생사’의 괴로움은 ‘번뇌’에 의해 생겨납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선택하여 열반을 얻으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열반’은 ‘보리’에 의해 얻어지는 경애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열반의 경애를 얻기 위해서는 보리, 즉 참된 깨달음을 열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을 선택하여 열반을 얻으려는 잘못된 생각을 타파하는 종교가 대승교입니다.
법화경 수량품의 문을 같이 공부해 보겠습니다.
●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현실에서 생사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깨달음은 무엇인가?
대승불교는 일찍이 석존이 목표로 했던 것처럼 이 현실세계에서 열반의 경애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세계에서 생사(生死)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깨달음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법화경 수량품에서는 “여래는 여실히 삼계의 상을 지견하건데, 생사에 혹은 물러가고, 혹은 나옴이 없고”(법화경 481쪽)라고 설합니다. 부처는 있는 그대로 이 세계를 보고 있다. 생과 사라 해도 이 세상을 떠나 어딘가 가서 없어지거나, 이 세계에 출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표면적인 생과 사에 사로잡혀 번뇌에 미혹되고 괴로움의 경애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법화경에 설한 것처럼 “이 세상에는 생도 없고 사도 없다”고 깨달아서 열반의 경애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는 생도 있고 사도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생과 사라 해도 이것은 생명에 본디 갖춰 있는 모습입니다. 생명은 어느 때는 생으로 나타나고, 어느 때는 사의 상태가 됩니다. 생명은 항상 현실세계와 함께 있습니다.
죽었다고 해서 다른 차원의 세계에 가버린다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영원상주(永遠常住)의 존재입니다. 법화경은 영원한 생명으로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생사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 신심을 한다고 해서 죽음, 늙음, 병이 없어지는(생사를 떠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죽음을 무턱대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듯이, 생명도 어느 때는 생으로, 어느 때는 사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승의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 쪽으로 눈을 돌리게 하려고 하는 나머지 ‘생사(生死-괴로움이나 미혹)’를 떠나려는 경향성을 아직 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성인께서는 ‘생사’를 떠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사를 보고 염리(厭離)함을 미(迷)라 하며 시각(始覺)이라 한다, 그리고 본유(本有)의 생사(生死)라고 지견(知見)함을 오(悟)라고 하며 본각(本覺)이라고 하느니라.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할 때 본유의 생사 본유의 퇴출이라고 개각(開覺)하느니라/
생사를 보고 싫어하여 떠나는 것은 미혹이다. 생사란 본디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지금 대성인의 문하로서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할 때, 생사는 본디 있는 것이라고 깨닫고, 생명의 출현도 퇴거도 생명에 본디 갖추어진 모습이라고 깨달을 수 있다”(어서 753쪽)
대성인은 많은 어서에서 묘법을 끝까지 수지 한 사람은 환희의 마음으로 임종을 맞이할 수 있다고 되풀이 해서 강조하십니다. 신심을 한다고 해서 죽음, 늙음, 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유(本有)의 생사(生死)”입니다.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하버드대학교의 기념강연에서 말씀하셨듯이 ‘생도 환희, 사도 환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에는 본디 생도 사도 함께 갖춰져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이 없다면 살아가는 목표를 잃어버리고 그야말로 ‘살아 있는 송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인생의 총결산인 죽음이라는 커다란 마디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한정된 일생을 가치 있게 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번뇌즉보리의 측면에서도 보면, “이 병은 부처의 계책이신가”(어서 1480쪽) 병에 걸림으로써 자신을 응시하고 숙명을 깨달아 마음 깊이에서 불법을 구하게 됩니다. 대성인께서는 이 어서에서 신앙자가 맞닥뜨리는 병의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진지하게 불도를 구했을 때 병을 비롯한 인생의 고뇌가 지닌 의미가 전환되고, 그러한 것에 굴하지 않는 강한 자신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신앙에는 병을 비롯한 모든 고뇌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힘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숙명을 사명으로 바꾸는 삶의 자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을 변혁하고 단련해 끝까지 병에 맞설 수 있는 지지 않는 자신을 만든다.
그것이 학회원이 지닌 강한 힘입니다.
병도 자신의 성장에 필요한 본유의 생사로 됩니다.
● 맺음 말
이처럼 생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여 안심의 경애, 즉 불계의 경애를 얻기 위해서는 근본법인 남묘호렌게쿄를 봉창하고 광선유포를 위해 면려하는 실천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생사즉열반입니다. “즉의 일자는 남묘호렌게쿄이니라”(어서 732쪽) 생사를 열반으로 전환하는 힘은 남묘호렌게쿄입니다. 묘법을 실천하는 속에
진정한 생사즉 열반이 있습니다.
십계호구의 면에서 보면, 불계의 경애라고 해서 구계의 생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열반의 경애라고 해서 생사의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경애가 달라집니다.
광포에 매진하는 속에서 구축한 안심의 경애가 스스로의 생명의 밑바닥이 되어 늙음, 병 그리고 죽음을 맞이해도, 두려움과 공포가 아닌, 아름다운 인생승리의 인(因)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결국 죽음 앞에서 환희할 수 있는 안심의 경애는
사제직결의 순수한 신심으로 귀결 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도 하지 않고 “승복만 입으면 신도보다 위” “상승(相承)을 받으면 부처”라는 권위적인 악인(惡因)만 쌓다가 죽음 앞에 서면 어떨까요?
악귀입기신하여 동지를 SGI반대파로 매도한 집행부! 이를 보고도 침묵했던 사람들이 죽음 앞에 서면 어떤 모습일까요?
윤일병의 구타에 의한 죽음과 이를 지켜보며 침묵했던 병사들……
우리는 묘법의 당체입니다.
승려라고, 집행부 간부라고 인과의 법칙에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원점에 서서 새로운 각오로 민중구제를 위한 투쟁을 시작할 때입니다.
<생사즉열반, SGI-USA 교학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