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소소시 아차토안온과 번뇌즉보리
아래 질문은 카페, ‘일련정종’ 게시글 “일념의 대혁명이 곧 평화를 실현하는 근본”의 댓글 내용입니다.
법화경 수량품의 “중생견겁진, 대화소소시, 아차토안온, 천인상충만”이 말씀은 중생이 ‘하나의 세계가 멸해서 큰 불에 불탄다.’고 볼 때도, 내(부처)가 사는 이 국토는 안온하고 언제나 기쁨에 찬 천계, 인계의 중생으로 충만해 있다는 뜻입니다.
위의 글은 수량품의 내용이니 믿어야 하겠지만, ‘노름에 미쳐버린 남편, 싸움질만 하는 아이들, 장사는 안되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공포의 세계’는 “대화소소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아차토안온이라는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한가요? 그 방법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부처의 말씀은 추상론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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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민을 보리로 전환하는 힘이 남묘호렌게쿄
귀하의 말씀대로 대화의 세계를 안온의 세계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법화경은 추상론에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대성인은 고민을 보리로 전환하는 힘이 남묘호렌게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서에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어서 710쪽)의 원리가 있습니다.
번뇌는 미혹이나 고민을 말하고, 보리는 깨달음을 말합니다.
말씀하신 수량품의 “중생견겁진, 대화소소시”는 번뇌의 업화이고 “아차토안온, 천인상충만”은 보리에 해당합니다. 번뇌의 업화(業火)란 자신의 숙업에 의해 타오르는 불길을 말합니다.
번뇌즉보리라는 사고 방식은, 고민을 깨달음으로 전환시키는 법리입니다.
번뇌즉보리의 즉을 단순히 같다, 동일하다의 뜻으로 이해하면, 고민=행복이 됩니다. 고민이 그대로 행복이라면 고민이 있어도 그것을 해결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어도 ‘그게 인생이야’ ‘이게 행복이야’ ‘이대로 아무 일도 안 해도 된다’하며 현실을 무조건 긍정하고 맙니다.
실례로 닛켄종에서는 ‘즉’을 잘못 파악하여 부패타락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그대로 부처다’라고 생각하여 불도수행도 필요 없다고 결론짓고 말았습니다. “상승을 받으면 부처다” “승려는 수행을 하지 않아도 신도보다 훌륭하다”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 번뇌즉보리의 사고방식은 고민을 깨달음으로 전환시키는 법리
일반에서는 즉(卽)을 ‘곧바로’ ‘그대로’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즉(卽)을 서로 모순되는 성질이 하나의 당체 안에 모두 갖추어짐’이라는 느낌의 말입니다.
인간은 사물을 이해할 때의 버릇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 생명의 전체상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육체와 정신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생각합니다. 또 사회를 이해할 때도 인간과 환경으로 갈라 생각합니다.
이렇듯 인간은 사물을 나누어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하나가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서투릅니다. 사물을 나누어 생각하면 이해하긴 쉽지만 나누어버린 순간에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참된 모습이나 생명의 활력은 사라져버립니다.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실은 서로 관계하면서 하나의 생명에 함께 갖춰져 있습니다. 불법은 사물을 볼 때 두 가지 대립되는 요소를 인정하면서도 본디 나눌 수 없는 두 가지 요소를 하나의 것으로 포착하고 생명의 다이너미즘을 생생하게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즉(卽) 또는 불이(不二)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번뇌즉보리도 같은 원리입니다. 번뇌는 미혹이나 고민이고, 보리는 깨달음을 말하는데 겉으로 보기에 이 두 가지는 정반대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고민을 없앴다고 가정해 볼까요,
고민을 모두 없애면 과연 그것으로 행복할까요? 죽을 일도 없고, 병에 걸리지도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뭐든지 손에 들어온다, 무슨 일이든 원하는 대로 다 된다, 그렇게 되면 참으로 재미있는 인생이 될까요?
그렇게 되면 난 뭘 해야 할까? 라는 새로운 고민이 생길 것입니다.
우린 고민이 있기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힘이 솟고, 고민이 있기에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번뇌즉보리라는 사고방식은 고민을 깨달음으로 전환시키는 법리(法理)입니다.
고민을 어떻게 깨달음으로 전환시켜야 할까요?
● 고민을 어떻게 깨달음으로 전환시켜야 할까요?
대성인께서는 “즉(卽)의 일자는 남묘호렌게쿄이니라”(어서 732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번뇌(煩惱)의 장작을 태워서 보리(菩提)의 혜화(慧火)가 현전(現前)하니”(어서 710쪽) 여기서 번뇌는 괴로움이며, 괴로움을 만들어내는 욕망입니다. 보리는 행복이며 ‘경애가 열리는 것’입니다.
“번뇌의 장작을 태워서 보리의 지혜의 불이 나타난다”고 하지만, 번뇌를 보리로 전환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 됩니다.
이것이 귀하가 묻는 질문의 요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동지의 댓글 중에 “하지도 않은 행동을 했다고 하고, 왜 검찰에 저를 고발했을까요”라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런 고민을 어떻게 깨달음으로 전환시켜야 할까요?
어서 말씀대로 고민을 보리로 전환하는 힘이 남묘호렌게쿄입니다.
불도수행의 기본을 이루는 기둥은 신행학입니다. “‘신(信)’은 법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 ‘행(行)’은 불법을 실천하는 것. ‘학(學)’은 불법을 배우고 이해하는 것”
‘학(學)’의 면에서 보면, 대성인께서는 “우인에게 칭찬 받음은 제일의 수치이니라”(어서 237쪽) 우인이 아닌 대성인께 칭찬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불법을 신앙하는 사람은 사물의 근본 가치관을 판단할 때 어디까지나 불법에서 설하는 엄한 인과관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세간의 훼예포폄에 좌지우지되면 대선인(大善人)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댓글에는 “하지도 않은 행동을 했다고 하고, 왜 검찰에 저를 고발했을까요?”라고 있습니다. 신심을 몰랐다면 분하고 원통하여 미치고 팔짝 뛸 일이지만,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인생에 일어난 일은 반드시 의미가 있다. 또 의미를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이 불법자가 사는 자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과관계를 기준으로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방법을 책한 투쟁으로 끝없이 이어질 중고(重苦)를 바꾸어 금세에 멈추게 하는 것이 전중경수입니다. “방법을 책하자 이 대난이 닥치는 것은 과거의 중죄가 금생의 호법으로 초래한 것이니라.” (어서 233쪽)
우리는 방법을 책한다는 강한 투쟁에 의해 끝없이 이어질 숙명이 전환되고 있다는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에 눈을 떠야 합니다.
방법을 책함으로써 발생한 대난은, 고난이라기보다 생명의 단련이 아닐까요.
● 불계를 기조로 하는 괴로움과 지옥계를 기조로 하는 괴로움
‘신(信)’의 면에서 보면, 창제입니다. 고민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진지하게 창제(信)에 힘씀으로써 경애를 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경애를 열 수 있다는 것이지 번뇌를 없앤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언제나 고민은 따르게 마련입니다.
불계의 경애라고 해서 나머지 구계(九界)의 생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파도타기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고 파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무서운 파도’에서 ‘즐기는 파도’로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그러면, 묘법의 실천으로 무엇이 달라질까요?
같은 괴로움이라 해도 불계의 생명을 기조로 하는 괴로움과, 지옥계를 생명의 기조로 하는 괴로움은 전혀 다릅니다.
어떤 고난이 있어도 반드시 극복하고 말겠다는 유연한 경애로 안심하고 고민에 대처하는 것과, 이 괴로움은 영원히 계속되는 걸까? 이 고난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애타는 마음으로 괴로워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난 이제 깨달았으니 고민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또 ‘오랫동안 열심히 신심 했는데 병이 걸려 창피하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어서의 마음으로 바꿔야 합니다.
신심 도중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가 있기에 신심을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경애가 넓어질수록, 사람들을 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고민은 더욱 깊어집니다.
대성인께서는 “일체중생이 각각 다른 괴로움을 받는 것은 모두 니치렌 한 사람의 괴로움이다”(어서 758쪽)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행(行)’의 면에서 보면, 절복입니다.
‘파도타기 선수’가 금메달을 향해 소용돌이 치는 파도 속으로 뛰어들어가 자신을 단련해야 하듯이,
자비(慈悲)라는 성불의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악의 생명이 소용돌이 치는 사바세계로 뛰어들어가 사람들을 격려하며 단련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악구매리를 당하며 광선유포를 위해 투쟁하는 속에서 우리의 생명은 자비라는 금강의 생명으로 단련되는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께서는 “자기 중심의 삶에서 타인에게 공헌하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 인간혁명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원 전 2세기경의 인도 시인인 마트리체타는 석존을 찬탄하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자신의 책임이든 아니든
당신은
모든 걱정에서 해방되었음에도
굳이 스스로
이 덧없는 세상에 출현하였도다.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에 동기 따위는 필요 없다.
사람을 사랑하는데 이유 따위는 필요 없다.
당신은
벗이 없는 사람의 벗이 되고
가족이 없는 사람의 가족이 되었다”
이 시를 들으면 내면에서 솟아나는 자비의 마음으로 이 사람을 격려하고, 저 사람을 분발시키려는 석존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선생님께서는 “부처란 내적인 숭고한 혼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며,
평생을 고난에 맞서 당당히 싸우면서 이상을 실현하고,
모두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니치렌 대성인이야말로 자비의 당체이십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맺음 말
번뇌를 보리로 전환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고민을 보리로 전환하는 힘은 남묘호렌게쿄입니다.
‘신(信)’의 면에서 보면, 어떤 번뇌가 있어도 끝까지 불계의 생명을 기조로 살아갑니다.
‘행(行)’의 면에서 보면, 자기 중심의 삶에서 타인에게 공헌하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 인간혁명입니다
‘학(學)’의 면에서 보면, 사물의 근본 가치관을 판단할 때는 인과관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신심(信心)의 목적(目的)은 자비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대사회는 고민에서 도피하여 쾌적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지만,
참된 삶이란, 고민을 정면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일념을 바꾸려는 자세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대성인으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개목초 강의/ 제57회 시조깅고전답서/ 번뇌즉보리와 생사즉열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