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C작전과 학회파문 /<109>C작전 대화 없이 한장의 통지서

(109) ① 종문 C작전, 대화도 없이 한 장의 통지로 파문

myungho 2015. 3. 29. 10:46

(109) ① 종 C작전,

대화도 없이 한 장의 통지로 파문

 

 

 

 

종문이 학회에 파문통지서’(1991. 11. 28)를 보내온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입정안국님으로부터 ‘C작전에 대한 종문의 글을 “52년 노선 이탈과 C작전의 진실이라는 테마로 백운락 카페에 올렸습니다.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을 알고 싶다는 회원들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2003 11 25일 전국최고협의회에서 한 사람이 보배, 서민이 왕자라는 주제로 종문의 C작전에 대해 이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내용을 3회로 게재하였습니다.

 

 

● 광포의 대발전은 학회가 있어 가능

 

지난번 본부간부회 때도 말씀 드렸지만 이번 11월로 그릇된 종문이 학회에게 ‘파문통지서’(28일부)라는 문서를 보내온 지 12년을 맞이했습니다. 새로운 청년부 벗도 증가했기에 여기서 이 법난의 경위를 다시 한 번 짚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1990 3의 일이었습니다. 종문은 학회와 사전에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명가료(冥加料: 절에 바치는 돈)를 올리겠다고 통고해 왔습니다.

‘본존님 하부’가 1.5. ‘탑파공양(塔婆供養)’ ‘영대회향(永代回向)’이 2. 일반 사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통용될 수 없는 횡포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종문이 드디어 그 탐욕스러운 마음을 드러내려는 징조였습니다. 내가 원주(願主)가 되어, 승려가 기거하는 총1(1988)에 이어 총2방이 훌륭하게 완성된 것은 그 다음 달인 4월의 일입니다.

 

1990 1년 동안 학회는 총2방외에 8개 사찰을 건립했습니다. 덧붙여서 말하면 학회가 기증한 절은 지금까지 3 56개에 달합니다. 그 중에 내가 회장에 취임해서 건립한 것은 3 20개입니다. 더욱이 또한 7천만 명에 달하는 대석사 참배를 실시하여 정본당, 대객전의 건립을 비롯해 대석사 정비에 총력을 기울인 사실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신 일입니다. 대석사 부지는 전후 농지개혁으로 5 1백여 평으로 격감되어 있었습니다. 역대 닛쇼(日昇) 법주, 니치준(日淳) 법주, 닛타쓰(日達) 법주의 학회에 대한 감사와 찬탄은 무척이나 깊었습니다.

 

C작전이라고 불리는 학회파괴 모의

 

특히 1990년은 대석사 개창 7백 년을 기념해 9월에 이를 경축하는 문화제를 현지 시주오카 청년부가 중심이 되어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청년들의 진심을 다한 준비와 존귀한 땀을 흘리고 있는 와중에 닛켄의 무리는 분쿄구 니시카타에 있는 대석사 도쿄 출장소 (7 16)와 본산의 대서원(7 18)에서 이른바 'C작전’이라고 불리는 학회파괴 모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진한 비계를 꾸며서 니치렌을 적시” (어서 1120), “법화경 행자의 흔적을 없애고 모안(募案)을 꾸면서 종종(種種)의 부실을 고해바치는” (어서 853) 등의 성훈 그대로 광선유포를 방해하는 음모이고 모략이었습니다.

 

닛켄이 아키야(秋谷) 회장에게 “교만 방법이다!”라고 화를 내며 소리친 일은 본산에서 모의한지 3일 후인 7 21일의 일입니다. 그야말로 한 종파의 관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보기 흉한 광태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도 임박한 12, 종문은 갑자기 학회에 문서를 보내왔습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자유를 찬양하는 노래인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환희의 노래)을 부르는 것이 ‘외도예찬’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하는 등 모든 것이 부당하기 그지없는 트집이었습니다. 더군다나 7일 이내로 회답하라는 강압적인 통고였습니다.

 

● 이케다 회장 법화강총강두 파면

 

학회 간부가 그 진의를 물으려고 몇 번에 걸쳐 대화의 장을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종문은 그 모든 것을 거부했습니다. 더욱이 12 27일 임시 종회에서 일부러 종규(宗規)를 변경해

나의 법화강총강두직과 아키야 회장의 대강두직을 파면했습니다.

 

전국의 학회원이 얼마나 경악했는지 모릅니다. 본래 가장 즐거워야 할 우리 동지의 연말연시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게다가 이 무렵 ‘대백연화’ 신년호 (1991)에 닛켄은 ‘신년사’에서 학회 발전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닛켄은 이렇게 적고 있다. “특히 이케다 선생님의 지휘를 대서특필해야 하는 것은 전쟁 후 세계적인 이동과 교류 속에서 각국으로 넓혀진 신도 여러분을 조직화한, 세계광포를 향한 대전진을 도모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지구적 규모로 광포가 착착 진전을 보이고 있는 것은 <선시초>에 있는 성훈처럼 실로 광포사상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불법에서 엄하게 훈계하고 있는 ‘양설(兩舌) (일구이언)이고 ‘자어상위(自語相違)’ 그 자체였습니다.

 

1991. 닛켄은 예년 실시하는, 회장과 이사장과 나누는 새해 인사도 그리고 또 그 후의 어떠한 대화도 “자신을 ‘배알’할 자격이 없는 몸”이라는 등으로 딱 잘라 말하고 피해 다녔습니다.

대성인은 바로 그 료칸(良觀)이 겁을 먹은 채 ‘대화’를 계속 거부한 모습을 “니치렌이 (사도에서) 가마쿠라로 올라올 때는 문호를 닫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며 출입을 금하거나 또는 감기에 걸렸다는 등으로 꾀병을 부려 피했다” (어서 1283, 통해)라고 써 두셨는데 ‘현대의 료칸’도 완전히 마찬가지였습니다.

 

● 해외조직 교란, 본존님 하부 정지

 

더욱이 어서에는 이 ‘참성증상만(僭聖增上慢)’의 정체를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갈파하셨습니다. “경문을 거울(규범)로 삼아 료카보(료칸보)의 몸에 비추어 보라. 조금도 흐림 없이 부합하지 않는가. 첫째, 이름은 지계(持戒)의 승이라고 세상에 알려져 있어도 실제는 방일(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방탕함)함인가. 둘째, 간탐(몹시 탐욕스러움)함인가. 셋째, 질투함인가. 넷째, 사견(邪見)임인가. 다섯째, 음란함인가. 이 다섯 가지 사항에 다 부합하지 않는가”(어서 350, 통해) 이것이 료칸의 본성이라고 대성인은 엄연히 기술하셨습니다. 닛켄도 또한 참성증상만 그 자체였습니다.

 

료칸은 대성인 일문(一門)에게 온갖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닛켄은 학회를 탄압하고 학회를 잘라내려 했습니다.

 

‘질의서’를 둘러싸고 종문이 끝까지 대화를 거부했기에 학회는 ‘회답’을 보냈습니다. 그 속에서 종문의 부당한 주장에 항의하고 출처불명의 녹음테이프를 근거로 받아 적은 스피치 문장에 잘못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종문은 잘못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것을 바탕으로 한 질문항목을 전면적으로 취하했습니다. 이로써 본래 종문이 부린 생트집은 근본부터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문은 사죄하기는 커녕 그 후 해외조직 교란, 학회원에게 본존님 하부 정지, 학회원을 괴롭히고 동요시키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