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SGI/ 안나 카레리나와 관념뿐인 위선의성직자
<세계광포 신시대 약진의 해>
세계광포 신시대 약진의 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9세기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예술가 톨스토이, 그가 남긴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 명작 안나 카레리나! 책이 쓰여진지 백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도 전혀 위화감 없이 내용이 공감될 수 있다는 점은 그만큼 톨스토이가 인간을 관통하는 통찰력을 보여줬다고도 보실 수 있어요.
책을 보다 보면 괜히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인간의 본성과 추악한 면까지 인간사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 질투, 위선, 욕망, 일, 정치, 사상, 역사, 혁명, 갈등, 우정, 가족 등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구조에 대한 톨스토이의 모든 고민이 집약된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나 카레리나는 주인공으로 20살 연상인 남편과의 무의미한 결혼생활에 환멸을 느끼는 도중 브론스키를 만나 사랑에 빠져듭니다. 이 책을 인생의 지도 같다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인생의 굴곡과 다양한 면들이 교과서처럼 담겨 있다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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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명작 안나 카레리나!
줄거리로 보면 남편과 자식 있는 주인공 안나가 멋진 남자를 만나 무분별한 열정에 빠져드는 이야기입니다. 결과는 영혼을 빛나게 해줬던 남자도 잃고, 든든했던 가족도 잃고, 목숨도 잃게 됩니다. 불륜의 대가치고는 참으로 엄청납니다.
천계의 무상(無常)의 부귀영화(富貴榮華)에 의지하는 것은 진실한 성공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천상(天上)에 태어나서 오쇠(五衰)를 받았노라”(어서 474쪽)
천계의 기쁨과 성공은 반드시 쇠퇴하여 가을의 나뭇잎과 같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요?
사람마다 보는 시각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신심의 눈으로 보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 명예, 결혼, 등은 상대적인 행복입니다.
교학 시간에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절대적인 행복, 불법에서는 이를 자수법락(自受法樂)이라고 하는데, 이는 ‘스스로 법락을 받다’라고 읽습니다.
법락(法樂)이란 부처의 깨달음을 받아 누리는 최고의 절대적인 행복으로 묘법의 공덕을 자신이 받아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대성인께서는 “일체중생,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이외의 유락(遊樂)은 없느니라. 경(經)에 가로되‘중생소유락(衆生所遊樂)’운운. 이 글월, 어찌 자수법락(自受法樂)이 아니겠느뇨”(어서 1143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톨스토이와 함께 ‘절대적인 행복’을 찾아 정신의 여행을 떠나보시지요.
여행하면서 톨스토이가 종교를 선택하게 된 동기와 우리들 자신이 종교를 선택했던 동기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요?
아래 내용은 이케다 선생님의 <특별강좌 ‘톨스토이를 말한다’>의 글 일부입니다.
● 진정한 행복을 찾아 떠나는 정신의 여행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행복입니다.
그럼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내용은 사람에 따라 다양할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저술한 후 45세에서 49세까지 「안나 카레리나」를 집필합니다. 책에는 주인공이 순수하게 사랑을 추구한 까닭에 부조리한 사회에 짓눌리는 비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장편이 쓰여진 배경에는 톨스토이 자신과 남매의 인생 갈등이 있었습니다.
행복도, 명성도 손에 쥐고 있던 주인공, 안나. 남편과 미묘한 마음의 갈등에서 안나의 가정은 파괴되어 갑니다. 가장 사랑한 어린 아들과도 강제로 헤어지게 됩니다.
아들 생일날 몰래 만나러 간 안나는 쏟아지는 눈물로 가슴이 미어져 준비해 온 장난감을 건네는 것조차 잊어버립니다. 아들은, 이유는 몰랐지만 가장 좋아하는 어머니가 불행하며 괴로워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사랑을 왜곡시키는 사회, 지각 없는 편견, 안나는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더욱이「안나 카레리나」의 마지막 장에서 남의 눈에는 행복의 절정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남편 '레빈'이 자기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왜 이곳에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인가?’를 알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 수 없다. 결국 살 수 없는 것이다.”
★ 선생님께서는 “인간의 행 불행을 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외형만의 변혁에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직, 권력, 돈에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권력의 마성에 취해버린 집행부의 안타까운 현실을 생각하며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톨스토이는 무엇 때문에 사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살 하기직전 벼랑 끝에 겨우 버티고 서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안나'도 불행했습니다. 그러나 남편 '레빈'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어려운 문제에 답을 준 것은 한 사람의 농민이 한 말이다. “혼(魂)을 위해 살아라!”
민중과 나눈 대화를 계기로 남편 '레빈'은 신앙에 눈을 뜹니다.
★ 혼을 위해 살라는 말은, '숙명전환' '인간혁명'을 위해 살라는 말입니다. 작가인 톨스토이도 여기서 '안나'의 이야기를 끝내고, 절대적인 행복을 찾기 위해 종교를 갖게 됩니다.
● 인간을 철저히 탐구한 톨스토이의 행보는 마침내 종교로 향한다.
50세를 앞두고 톨스토이는 인생 최대의 ‘위기’에 부딪쳤습니다.
‘생사(生死)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문제입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비유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보트에 태워져 강의 흐름에 맡겨 온 것과도 같다. 본래는 강 건너 기슭을 목표로 노를 저어야 했으나, 흐름이 빨라 목적지를 잊고 말았다.
내 주위에는 그저 강이 흐르는 대로 환성을 지르고 미친 듯이 기뻐하며 하류로 떠내려가는 뱃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하류의 여울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여울을 타게 되면 곧 보트는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사실, 박살이 난 보트도 보였다. 나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리고 흐름을 거스르며 보트를 젓기 시작했다.”
★ 안나도 "강이 흐르는 대로 환성을 지르고 미친듯이 기뻐하며 하류로 떠내려갔습니다" 결국 그녀는 가정도 사랑하는 남자도 모두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집행부도 마침내는 모든 것을 잃게 되겠지요, 지금을 최대의 위기로 생각해 변독위약의 신심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톨스토이는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존경하는 큰형 니콜라이도 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이라는 문제는 늘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한 곳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하나의 검은 얼룩이 되어 마음속 깊이 새겨지고 말았습니다.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내가 죽어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살다가 죽는다. 나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어떻게 나는 나를 구제해야 하는가!”
일상생활은 분주하게 지나간다. 영지를 관리한다. 아들을 교육한다. 글을 써서 큰 명성을 얻는다.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마음의 소리가 절규합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대답할 수 없습니다. ‘답을 찾아야만 한다.’고 톨스토이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종교, 사상, 철학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 위선의 성직자가 아닌 순수한 민중 속에서 살아 있는 신앙을 발견
톨스토이는 사색에 사색을 거듭했습니다.
타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교전(敎典)도 정밀하게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답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가난하고 소박하며 학식도 없는 사람들 속에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 신앙은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불가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의 의의를 자각하여 삶도, 죽음도 마음 편안하게 흔들림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관념뿐인 학자나 위선의 성직자가 아니다. 민중 속에서 톨스토이는 살아있는 신앙을 보았습니다.
★ 관념뿐인 위선의 성직자라면 누구일까요? 집행부가 떠오릅니다. 여래수량품 제16의 글입니다.
시제죄중생/ 이 여러 가지 죄를 지은 중생은,
이악업인연/ 악업의 인연으로
과아승기겁/ 아승기겁을 지나도
불문삼보명/ 삼보의 이름을 듣지 못한다.
여기서 ‘죄’는 묘법에 대한 불신이고, 집행부의 입장에서 보면 사적대입니다. ‘악업의 인연’은 끊임없이 번뇌·업·고가 반복됨을 뜻합니다.
그 사람은 불국토에 있어도, 스스로 자기 주위를 안개로 가려, 눈앞에 있는 부처를 보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불신’ 때문에, 완고히 마음의 문을 닫아, 아승기겁이라는 긴 세월 동안, 삼보의 이름마저 듣지 못합니다.
집행부는 신앙과 생활이 별개입니다. 스승의 직원이면서도 위대한 삼보의 이름을 듣지 못합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민중이 나를 구제해 주었다”라고 톨스토이의 전기 속에서 로맹 롤랑은 통찰했다. 생활과 신앙을 일치시키고 있는 단순한 사람들 속에 단연 몸을 던졌습니다.
★ 생활과 신앙을 일치시키기 위해 순수하고 올바르게 신심을 관철하는 사람은,
부처가 중생을 구하기 위해 법을 설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묘법의 공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도 여래수량품 제16의 글입니다.
제유수공덕/ 많은 공덕을 닦아서
유화질직자/ 유화(열린 마음)하고 똑바른 마음을 가진 자는 모두
즉개견아신/ 내(부처) 몸을 본다.
재차이설법/ 이곳에 존재해 법을 설하는 모습을,
여기서 ‘유화(柔和)’는 완고함과 편협함을 버린 ‘열린 마음’입니다. 선입관이나 편견, 세상의 체면 등에 구애하지 않고 바른 것을 바르다고, 있는 그대로 보는 정신입니다.
파화합승의 오역죄를 범한 집행부를 가책하는 엄부의 정신입니다.
‘질직(質直)’은 똑바름, 정직이라는 뜻입니다. 선하고 위대한 것에 ‘똑바로’ 향해 찾아 가는 자세입니다. 이는 스승을 구도하는 사제직결의 정신입니다.
‘유화질직(柔和質直)’한 사람은 영원한 부처가 보입니다. ‘언제나 부처와 함께 있다.’ ‘항상 부처와 함께한다.’라는 ‘확고한 안심’ 속에 고독함이나 초조함, 불안함이나 절망감을 극복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유화’ ‘질직’은 어본존에 대한 신심이고, 그 수행은 자행화타에 걸친 창제행입니다.
궁극적으로 생사를 해결하는 길은 신앙밖에 없습니다. 니치렌 대성인께서는 “우선 죽음에 관하여 배우고 나중에 다른 것을 배워야한다”(어서 1404 통해)라고 가르치셨다. 생사의 고통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행복이란 고난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에 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대성인께서는 “마음만이 중요하니라”(어서 1192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거친 파도도 모두 승리를 향한 힘으로 만들어 금강불괴의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 선생님께서는 이혼문제로 상담을 청해 온 멤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혼한다, 안 한다는 개인적인 문제이고 당연히 본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는다.’라는 삶의 태도는 불법에 없습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생각해 주세요"
집행부도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는다.’는 신심 이용의 질주는 여시서 멈춰야 합니다.
● 맺음 말
니치칸 상인께서는 “우리는 묘법의 역용(力用)으로 즉 연조 대성인으로 나타나느니라” (당체의초문단)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부처와 동등한 힘이 자신 속에서 솟습니다. 여기에 신심의 가장 깊은 뜻이 있습니다.
법을 위해, 타인을 위해, 평화를 위해 행동하면서 ‘생(生)도 환희’ ‘사(死)도 환희’라며 영원한 행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자신이 바뀌면 가정이 바뀝니다. 직장이 바뀝니다. 지역이 바뀝니다. 그것이 세계도 바꾸어 갑니다. 여기에 인간혁명이라는 희망의 방정식이 있습니다.
★ 법과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삶 속에 절대적인 행복이 있습니다.
‘자신이 바뀌면 가정이 바뀐다’
‘개혁연대가 바뀌면 집행부가 바뀐다’는 것은 의정불리의 방정식입니다.
자신이 바뀐다는 실천 없이 창제만으로 공덕을 바란다는 것은 미신입니다.
닛켄 역시 같은 창제를 하고 있지만 스스로가 바뀌지 않기 때문에 무간대성입니다. 집행부도 자신이 바뀌지 않는가면 무간지옥입니다. 지상규명에 나와야 합니다.
톨스토이가 종교를 탐구한 글을 쓴 자전적 소설이 「참회록」입니다. 51세에 착수하여 53세에 완성했습니다. 「참회록」에서 톨스토이는 선언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종교적 신념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의 자기 인생을 단호히 부정했습니다. 사회적인 영예가 정점에 달한 인간이 이른바 ‘나는 인생을 다시 시작 했습니다!’라고 공언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