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체험/ 차명호, 재일교포 가네다 선배
<김형기, 차명호, 교또(京都), 1986년>
초창기에 신심을 알려준 분들이 재일교포라고 들었습니다. 그 중에도 가네다 선배는 조국의 광선유포와 청년부 성장을 위해 몸을 던져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차 선배님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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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교포 가네다 선배
가네다 선배, 참 고마운 분이셨습니다. 한국이름은 ‘김형기’라고 합니다.
당시 창가학회는 한국정부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었고, 학회 관련 서적을 반입하거나 집회를 여는 것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가네다 선배는 인간혁명 중에 중요한 부분을 뜯어 한국에 갖고 들어와 청년들에게 세계평화를 향한 이케다 선생님의 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선배는 청년들에게 “평생 스승이 있다는 긍지와 비길 것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다”며 끝까지 사제의 인생에 살아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큰 형처럼 참으로 엄했지만 마음만은 한 없이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선배가 한국에 오는 날이면, 선배가 묵는 모텔 방이 청년의 열기로 가득 찼습니다. 많은 청년이 다녀가는 모습을 보고, 모텔 주인은 선배를 유명한 철학교수라고 불렀습니다.
선배로부터 인간혁명 강의를 받은 청년들은 광포라는 한 마음으로 뜨거워 졌고, 그 열기는 전국으로 번져 갔습니다.
● 춥고 배고픈 청년들에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 준 선배
청년들에게 식사 한번 사준 적이 없는 구두쇠 가네다 선배가,
어느 날 식당엘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여 명의 청년들은 모처럼 선배의 초대에 즐거운 마음으로 동태찌개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문제는 식사 후였습니다.
식사를 마친 선배는 카운터에 자기 식사값만 내고 그냥 나가버리는 거였습니다.
당시 청년들의 생활은 어려웠기 때문에 여유 돈을 갖고 다니는 청년은 별로 없었습니다. 갑작스런 사태에 각자 주머니를 털어 간신히 위기는 면했지만,
그 후 청년들 사이엔 ‘각자부담’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져갔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남에게 기생하려는 약한 마음이 생기면, 선배를 생각하며 '혼자 서는 습관'을 갖게 됐습니다.
강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강하게 일어서라.
강하게 싸워라.
그것이 선배의 마음이었습니다.
선배는 춥고 배고픈 청년들에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당시 선배의 별명은 ‘고춧가루’이었지요.
일본이 처음인 한 청년이, 동경연수에서 선배와 같이 전철을 탈 기회가 있었습니다.
선배가 전철 표를 사서 출구로 가자, 그는 당연히 자기 표도 샀을 줄 알고 따라가다 ‘니 전철 표 샀나?’라는 선배의 말에, 다시 매표소로 달려가-
서투른 일본어로 손짓발짓하며 표를 샀다는 체험을 들었습니다.
그는 연수 귀국 보고에서 ‘구두쇠 짠 돌이 선배! 치사한 선배!’라고 투덜댓지만, 선배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는 체험을 들려 준 청년도 있었습니다.
● 교토의 가네다 선배를 찾아
당시 가네다 선배로부터 세계광포를 향한 이케다 선생님의 사제정신을 배운 청년들은, 대 간부로 성장하며 한국광포에 금주성을 쌓아 갔습니다.
선배의 한국방문은 일본의 학회 청년부 최고 간부들이 한국에 나오면서 멈췄습니다.
★ 이즈미 한국지도장과 가네다 선배는, 한국광포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두 분은 은사와 열사와 같으니”(어서 1088쪽)
지도장이 앞에서 끌면
, 가네다 선배는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싸웠습니다.지도장이 가는 곳에는 그림자처럼 가네가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즈미지도장은 95사태의 원흉이 되었고, 가네다 선배는 지금도 만인의 가슴속에 금빛 추억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선생님께서는 “그것은 그가 자신과의 싸움을 그만두었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악’을 자각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악에 물들고 만다”(법화경의 지혜, 3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도장은 장기집권이라는 권력의 욕망에 패배했고,
선배는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아는 지혜로움으로 승리한 것이 아닐까요?
미래를 위해 저의 생각을 그대로를 말씀드렸습니다.
그 후 저는 남자부를 졸업하고 장년부에서 활동하면서, 교또(京都)에 살고 있는 가네다 선배를 찾아갔습니다.
세계광포를 향한 이케다 선생님의 사제정신을 가르쳐 준 은혜로운 선배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어서 였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점심을 사주셨슶니다. ‘일본라면’이었지요.
선배는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변함 없는 구두쇠였습니다.
그러나 ‘라면’ 속에 담긴
‘민중개가의 시대로 나가려면 전대미문의 고난을 극복해 나아가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슴에 담아 올 수 있었습니다.
선배와 마지막 먹은 ‘라면’의 추억은
광포의 산을 오를 때마다 아픈 상처를 치료해 주는 길동무가 되었습니다.
● 맺음 말
태평양의 은빛 파도를 바라보며 선배와의 추억을 생각합니다.
“광포의 도상에서 선생님 품에 안겨 죽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세요”라는 선배의 간절한 말씀이 파도소리와 함께 귓전에 들려옵니다.
그는 저에게, 강한 선배, 자랑스러운 선배였습니다.
금생에는 위대하 스승, 강한 선배를 만나 후회 없는 광포의 추억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 젊었을 때 간경화라는 불치의 병을 인연으로 학회에 입문하여, 이케다 선생님을 만났고, 가네다 선배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광포의 뜰에서 동반자로 아내를 만났습니다. 대성인께서는 “반드시 삼장사마라고 하는 장해가 나타나는데, 현자는 기뻐하고 우자는 물러남”(어서 1091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삼류의 강적인 95사태를 만났고, 사명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즈미 지도장이라는 삼장사마 앞에 고개 숙여 타협했다면 부이사장으로 대우받으며 편히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굴욕적인 인생은 딱 질색입니다. 아내와 저는 대난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기산하를 뒤돌아보면, 몰이해, 비난, 중상, 박해 등, 목숨을 걸지 않으면 넘을 수 없는 험한 길들입니다. 반역자라는 멍에를 쓰고 불교회에서 쫓겨나, 영어도 모르고 아는 이도 없는 미국으로 건너와 한의사의 길을 걸어가며 끝까지 악을 추격할 수 있었던 것은, “광포의 도상에서 선생님 품에 안겨 죽고 싶다”는 생명에 각인된 선배와의 맹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어느 별에서 선배를 만나게 될지...... “옛 스승은 지금의 제자이고, 지금의 제자는 옛 스승이니”(어서 1556쪽) 다시 만날 때는 내가 선배가 될 수도 있겠네요. 금생은 선배의 무기가 고춧가루였다만 제가 선배가 됐을 땐 어떤 무기를 사용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