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이상한 집행부 개혁연대로 돌아가고파.
<우만다라화 산불급대중/ 하늘에서는 우만다라화를 내리게 하여,
복덕의 꽃이 부처에게도 중생에게도 차별 없이 평등하게 쏟아지고 있다>
안녕하세요…… 저는 ㅇㅇ市 에서 어머니를 따라 입신하여 신심 하던 중, 95사태 때 제명(당시 미래부)당한 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신심을 잊고 지냈습니다. 그러다 서울 집행부와 연결이 되어 다시 입신 해 신심을 해오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95사태 때 현장에서 ‘대화로 진실을 밝히자’고 뛰셨고 개혁연대로 최근까지 지내오시며 많은 공덕을 받았으나<생략> 집행부로 들어오셨습니다.
문제는 어머니께서 집행부가 지금 해나가는 신심이 이상하다고 느끼시고 다시 개혁연대로 돌아가고 싶어하시고.
저도 집행부 내에서 반담사명을 맡고 있지만 서울의 간부들도 95사태의 심각성과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간부님들은 창가학회가 눈부시게 발전했고 공덕을 받는 곳이 혈맥이 흐르는 곳이라 하십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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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있는 편지 감사합니다.
“어둠은 와도 나는 노래한다. 왜냐하면 반드시 아침이 오기 때문이다”
이 시(詩)는 군사정권의 탄압과 싸워온, 브라질 시인 멜루 씨가 투쟁하며 직접 읊은 시입니다.
★ 시(詩)를 보면 불굴의 신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대단한 확신입니다.
학회도 지금은 분열이라는 어둠에 가려 있지만, 다함께 노래하며 전진했으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욱일의 태양이 떠 오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태양이 떠오른다고 믿는 마음이 우리 불법입니다.
● 신심의 혈맥(血脈) 없이는 법화경을 가질지라도 무익하니라
혈맥(血脈)에는 법체의 혈맥과 신심의 혈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심의 혈맥이 없다면 법체의 혈맥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 아니라, 부정부패와 독재를 위한 대통령이라면 대통령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대성인께서는 “신심의 혈맥(血脈) 없이는 법화경을 가질지라도 무익하니라”(어서 1338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치코상인도 “신심과 혈맥과 법수란 즉 똑 같은 것이니라”(유사화의초주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혈맥이란 비밀스러운 의식이 아니고 신심이며 강성한 신심만이 대성인의 경애를 자신의 생명에 흐르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장소가 개혁연대든 무인도든 사제정신의 신심만 있다면 그 자체가 혈맥입니다.
당연히 창가학회가 올바른 신심으로 공덕을 받아왔습니다.
‘한국SGI 불교회’도 ‘한국SGI 개혁연대’도 같은 이케다 선생님의 조직입니다. 별해서는 니치렌 대성인, 총 해서는 신행학에 면려하는 우리들 제자의 조직입니다.
사제(師弟)가 바로 니치렌 불법의 혼(魂)입니다.
“사제를 관철하며 사는 인생만큼 숭고한 인생은 없습니다. 사제불이가 바로 고난을 물리치고 인생을 승리로 장식하는 이검(利劍)입니다. 광선유포 승리의 원동력입니다.”(법련 2015, 5월호, 107쪽)
신심은 장소나 주위, 명예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순수한 신심을 관철하는 사람만이 공덕을 쟁취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강적이 겹치고 더해도 결단코 퇴(退)하는 마음 없을지어다”(어서 505쪽) 대성인께서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경계하시고 ‘단 한 사람도 퇴전시키지 않겠다’고 마음을 쓰셨습니다.
★ 사적대한 집행부이니, 당연히 이상한 집행부입니다.
집행부에서는 조직을 분열시킨 파화합승의 죄를 숨기기 위해 회원들을 감시하고,
회원들은 집행부의 눈치를 보며 쉬쉬 하니,
좌담회가 얼마나 음산하겠습니까?
대통령도 사종을 믿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집행부에서도 지혜롭고 현명하게 신심해 가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님이 집행부에서 개혁연대로 옮긴다는 것은 자유이지만, 지금 있는 곳에서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경애를 넓혀가면 어떨까요.
● 지금은 삶의 기쁨과 꿋꿋이 사는 활력을 되살아나게 하는 시인의 지혜가 필요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어둠으로 길을 잃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 후, 정신적인 공백 속에 방황하던 청년들은 휘트먼의 시 ‘풀잎’에서 얼마나 힘을 얻었는지 모른다. 그의 자유로운 정신의 세찬 흐름은 온몸에 전율을 느낄 만큼의 충격을 주었다”
“지금은 젊은 생명을 천둥소리처럼 뒤흔드는 시인의 대 음성이 필요하다. 삶의 기쁨과 꿋꿋이 사는 활력을 되살아나게 하는 시인의 지혜로운 말이 필요하다.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서로 연결하는 시인의 ‘평화와 공생의 외침’이 필요하다.
지구인은 모두 시인이어야 한다”(미래를 바라보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부인부님의 대학시절을 생각하며 읽어주시면 어떨까요?
젊은 생명을 천둥소리처럼 뒤흔드는 시인(詩人)은 누구일까? 삶의 기쁨과 꿋꿋이 사는 활력을 되살아나게 하는 시인은 누구일까?
다음 내용은 세계계관시인이자 인류의 스승이신 이케다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 가려운 곳만을 긁으며 사는 인생에 진정한 행복은 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불행’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으로 잘못 보고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욕망의 추구’와 ‘행복’은 다릅니다.
만일 같다고 생각한다면 소크라테스가 비유한 ‘가려운 곳을 긁으며 사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에서 더 고차원의 목표로 상승하지 않는 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더 고차원의 목표로 상승한다는 게 뭘까요?
그것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보다,
내 마음의 세계를 더 풍요롭고 더 크게 하는 길입니다.
★ 물질적인 공덕만을 위해 집행부에서 개혁연대로 옮긴다는 것은 ‘가려운 곳을 긁으며 사는 인생’의 범주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는 “숙명을 사명으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려운 곳을 긁으며 사는 인생’이란 숙명에 비교가 되고, ‘고차원의 목표’란 사명에 비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향락적인 외관상의 즐거움은 현실의 거센 파고 앞에서는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고뇌와 공포가 충만한 이 세상을 살아 간다는 것은,
매우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자기 경애가 낮으면 인생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우만다라화 산불급대중(雨曼陀羅華 散佛及大衆)/ 하늘에서는 경사스러운 만다라화를 내리게 하여, 부처와 다른 중생의 머리 위해 뿌리고 있다. (법화경 여래수량품)
우만다라화란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일이고, 산불급대중은 복덕의 꽃이 부처에게도 중생에게도 차별 없이 평등하게 쏟아진다는 뜻입니다.
부처도 중생도 모두 사바세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행복을 실현하는 무대는 우리가 사는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정토(淨土)라 하고 예토(穢土)라 함도 토(土)에 둘의 차이(差異)가 없으며, 오직 우리들의 마음의 선악(善惡)에 의(依)한다고 쓰여 있다”(어서 384쪽)
마음 하나로 세계가 변합니다. 중생의 눈에는 이 세상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보이지만, 부처에게는 엄연히 불국토이며 정토입니다.
신심의 눈으로 보면 집행부도 개혁연대도 토(土)에 차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대성인께서는 “겁이 많아서는 불가능하니라”(어서 1193쪽)라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거센 파도에 지지 마라, 비열한 마군에 지지 말라는 대성인의 만감이 담긴 격려입니다.
★ 개혁연대로 조직을 옮기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 곳에서 또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면, 그 땐 갈 곳이 없어지게 됩니다. 부모가 신심을 반대하는 회원들도 있습니다. 집행부에서도 지혜롭게 신심하는 것을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는 하나, 이타 없이는 진정한 자리도 없어
‘행복’은 ‘충실’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복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을 추구할 때 더 깊은 충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자타 함께 행복’을 지향하는 삶이 바로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실현하는 길이 아닐까요.
대승불교에는 이러한 인간상을 추구하는 보살이 등장합니다. 보살은 자신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제는 제쳐놓더라도 고뇌하는 사람을 구제하려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보살에게 타인을 위해 공헌 하는 일은 그대로 자기 성장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는 하나다. 아니 이타 없이는 진정한 자리도 없습니다.”
보살은 지옥의 괴로움을 맛보는 것보다 ‘이타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존재하는 의의를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동지를 “SGI반대파”로 매도한 집행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악(惡)일 수밖에 없습니다.
보살이라고 해도 특별한 인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인간이라도 본래 존귀한 보살의 마음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불법의 지견이며 생명관입니다. 십계호구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종교나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사람이라도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모두 보살입니다.
타인을 위해 공헌하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직함이나 지위도 필요 없습니다. 보살도는 알기 쉽게 말하면 ‘사람을 격려하는 삶’입니다.
그것도 자신은 상처 받지 않는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고뇌 속에 뛰어들어 탁한 사회에서 생명의 빛을 발하며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인생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이 세상에 생을 받고 태어난 의미를 찾고,
끝없는 행복과 환희로 충족됩니다.
“자기중심의 삶에서 타인에게 공헌하는 삶으로 전환, 이것이 ‘인간혁명’입니다”
★ 공덕이란, 육근청정이며 생명의 충실감입니다.
학회에서는 타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 자신에게 플러스가 된다는 사명의 인생을 변독위약의 인생이라고 합니다.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면,
자신이 고뇌를 결연히 이겨내는 힘을 늘릴 수 있습니다.
● 불전의 겨자씨에 대한 설화
불전에 유명한 설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석존을 찾아가 ‘부디 이 아이를 되살아나게 해주십시오’라며 매달리듯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석존은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그 약을 만들어 드리리다. 마을로 가서 겨자씨를 받아오시오. 단 그 겨자씨는 죽은 자가 없는 집에서 받아와야 합니다”
어머니는 한 집 한 집, 모든 집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잃지 않은 집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돌아다니다 결국 어머니는 어느 집이나 같은 슬픔을 갖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슬픔만이 절대 특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이윽고 어머니는 덧없는 인생의 절망도 무력감도 모두 이겨내는 삶에 눈을 떴습니다.
★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자신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경애혁명뿐입니다. 소아에서 대아로, 그러기 위한 신심입니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수행을 거듭할수록 단련이 됩니다.
단련에 필요한 것은 돈도, 권력도, 학력도 아닙니다.
오로지 사제를 향한 순수한 신심이면 됩니다.
가령 초보자에게 공포로만 여겨지는 급경사라도, 단련된 스키어에게는 유쾌한 도전의 기쁨을 느끼게 합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비애를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어머니는 자기만의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 더 크고 더 강한 자아(自我)로 자신을 고양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더욱이 그 경험은, 같은 슬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애의 행동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 맺음 말
타자와 더불어, 타자를 위해, 용기를 갖고 한 걸음 행동으로 옮기면,
어머니의 비애는 더 큰 생명력을 얻기 위한 기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를 불법에서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고 합니다.
질문을 주신 어머니의 비애를 극복할 수 있는 열쇠는 동고(同苦)의 힘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타자의 고통을 가슴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불법(佛法)이라고 함은 승부(勝負)를 우선으로 하고”(어서 1165쪽)
불법은 승부이고, 인생도 승부입니다. 불법은 부처와 마가 싸우는 생명 근본의 투쟁에서, 모든 사람이 승리하기 위해 설한 법리입니다.
마를 물리치고 성불하느냐,
아니면 마에 져서 미혹에 빠진 인생을 보내느냐,
우리가 인생에서 불법을 실천하는 의의는 궁극적으로 이 근본적인 승부에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불법은 승부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기는가,
그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이야말로 소중합니다”(어서 1316쪽)입니다.
<참고문헌: 미래를 바라보며, 어서의 세계 제3권, 벤전니부인어서 제70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