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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롯데그룹 왕자의 난과 생로병사<불법에서 말하는 사후세계>

myungho 2015. 8. 12. 10:56

(204) 롯데그룹 왕자의 난과

생로병사(生老病死)<불법에서 말하는 사후세계>

 

 

 

 

 

롯데 家의 형제의 난을 보면서 절로 무상한 인생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생사(生死)라는 근본문제를 피해 아무리 번영해도 그것은 뿌리 없는 풀이며 모래 위에 세운 누각입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 그러나 단지 무상함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는 별수 없습니다.

세상을 비관해도 가치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 무상한 인생에서

어떻게 영원한 가치를 만드느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법화경입니다.

 

 <잠실 롯데월드타워>

 

 

인간계든 자연계든 모든 것은 변화와 변화의 연속입니다.

불법의 눈은 실상을 제행무상(諸行無常: 여러 현상은 항상 변한다)”이라고 포착했습니다. 이것을 우주관에서 말하면 성주괴공(成住壞空)이고,

인생관에서 논하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입니다.  

사의 문제는 예로부터 모든 종교나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었습니다.

 

철학을 죽음의 학습이라고 한 플라톤의 말은 매우 유명합니다.

죽음이 인간에게 무거운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무엇보다 죽음으로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무한한 부()나 권력을 손에 넣은 인간이라도

언젠가는 죽게 되는 숙명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 유한성을 자각하고 죽음의 공포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영원성에 참획(參劃)하여

동물적 본능인 삶의 방식을 초월한 하나의 인격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가 인류와 함께한 이유입니다. <중략>

 

전쟁과 혁명의 세기’(20세기) 남긴 비극은 인간의 행불행을 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외형만의 변혁에는 없다는 교훈을 명확히 남겼습니다.

따라서 21세기에는 이러한 생사관, 생명관의 변혁이

가장 주요해질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케다 다이사쿠,

하버드대하고 기념강연, 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에서, 1993.9.24>

 

 

 

● 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의 세계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특히 인간은 자신이 생을 마감할 때, 그 저편에 도대체 어떠한 세계가 있는가 하는 생각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낌니다.

 

석존은 죽고 싶지 않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죽음을 응시하고 싶지도 않다는 인간의 본능을 이겨내고, 생과 사의 본질에 대한 사색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이는 공상적인 가설로 진실을 어물어물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눈으로 진실을 응시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습니다. 이 대전제를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왜 죽는가?

생(生)과 사(死)는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인가?

아니면 밀접한 관계인가?

생명은 어떠한 흐름이 있는가?

석존은 용기와 인내, 그리고 냉정함을 지니고 자신의 생명에 빛을 비추어 그 진실상을 깨닫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깨달음이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본연적으로 생과 사를 지녔다. 인간의 생명은 생과 사를 번갈아 되풀이하면서 웅대한 물결을 이루며 영원히 흐른다석존은 자기 생명의 분류(奔流) 속에서 이점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생에 집착하여 확립된 영혼 불멸과 같은 사상이 아니라, 한 생명에 일관된 인과(因果)의 법칙을 간파하고 확립한 영원한 생명관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관에 서서 사()에 의의를 부여한다면,

()는 오히려 생()을 위한 것입니다.

마치 다음에 눈을 뜨기 위한 휴식을 취하는 잠과 같습니다.

()는 생()을 위한 방편(方便)입니다.

 

생을 더욱 빛내기 위한 것이며, 생이 바로 생명활동의 본디모습입니다. 생과 사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오히려 생을 위한 것이라고 자리매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법화경에 설해진 방편현열반(부처의 생명은 영원하며 석존이 중생에게 '부처를 구도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려고 방편으로서 열반을 나타냄)이겠지요.

 

불교의 본질은 무익한 비관주의나 염세주의도 아니거니와 근거 없는 낙관주의도 아닙니다. 인생의 고를 직시하고 거기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도전한 끝에 도달한 생의 환희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생명을 말한다, 3>

 

● 생과 사는 불이(不二) / ()으로 현재화하고 사()로 잠재화

 

()과 사()는 생명이 변화하는 모습이며, 반대로 말하면 생명은 생()과 사()로만 나타납니다.

범부의 눈에는 생명이 오로지 생으로 시작해 사로 끝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불법의 시점은 이 한계를 완전히 깨고,

생으로 나타나 사로 지속하는 전체를 관통하는 생명을 포착했습니다.

 

법화경 수량품에 약퇴약출(若退若出)이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이 후퇴하는 것이 사()에 해당하고 나오는 것이 생()에 해당합니다.

또 수량품에서는 영원한 생명관에서

생명은 후퇴하거나 나타나거나

태어나거나 죽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는데,

니치렌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더욱 깊은 본유(本有)의 생사, 즉 본디의 생사(生死)이며 본디의 퇴출(退出)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으로 올바른 생명관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현재화한 상태를 생, 잠재화한 상태를 사로 받아들이고 게다가 그 생사를 무한히 지속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생을 현재화, 사를 잠재화로 받아들이는 구극의 불법 철리는

얼마나 유구하고 위대한 생명을 간파하고 있는 것일까요?

 

더욱이 생과 사는 불이(不二)라고 설합니다. 생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잠재된 묘한 힘(인과)이며 또 잠재된 생명은 이윽고 연을 만나 현재화해 정력적으로 생을 영위하고 풍부한 색채로 개성을 발휘합니다.

 

마침내 그 생은 조용히 후퇴하여 사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 잠재화는 새로운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새로운 다음 생을 기다립니다.

말하자면 생()은 그때까지 쉬면서 비축한 생명의 힘이 폭발하고 연소한 것이며,

마침내 인생의 책 한 권을 다 쓴 뒤 사()로 향합니다.

 

그 우주에 명복되고 잠재화된 생명은 우주 생명의 힘을 자신에게 충전시키면서 생으로 비약할 때를 기다립니다. 이것이 본디의 생사이며 이 우주 본연의 리듬의 근원이 묘호렌게쿄입니다. <참고문헌: 생사일대사현맥초>

 

● 생로병사(生老病死)

 

무엇을 위한 신앙인가?

그것은 누구보다 훌륭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고뇌를 유유히 타고 넘기 위해서입니다.

 

(): 인생은 살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꿋꿋이 살아야 합니다.

온갖 괴로움을 이겨내고 온갖 고난을 이겨내며 하루하루를 어떻게 힘차게 살 것인가, 묘법의 신앙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을 줍니다.

 

★ 신격호 회장의 형제의 난은 생()의 고뇌에 해당합니다.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목적관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고, 먹고, 허무하게 죽는다면 차원이 낮은 동물적인 인생이 아닐까요?

 

그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사회를 위해,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 무엇인가를 창조한다. 무엇인가에 공헌한다. 그러기 위해 목숨이 있는 한 한평생 끝까지 도전한다.

그래야 비로소 충실한 인생입니다. 가치 있는 인생입니다.

인간다운 고차원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묘법의 신앙은 그 중에서도 남을 위해 자신을 위해

최고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 인생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맙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노인이 되고 체력도 떨어집니다. 여기저기 고장도 납니다.

93세의 신격호 회장 확실히 병() 과 로()와 사()의 고뇌를 같이 갖고 있습니다.

 

그 때 외롭고 쓸쓸한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을의 황금빛 결실과 같은 풍요로운 자신이 되기 위한 신앙입니다.

저녁 노을은 천지를 온통 장엄하게 물들이고 빛납니다.

그 노을 빛과 같은 노년을 후회 없이 웃는 얼굴로 맞이하기 위한 신앙입니다.

 

(): 살아 있는 몸입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병으로 고생합니다. 묘법이 그 병고를 씩씩하게 이겨내는 힘을 솟아나게 합니다.

남묘호렌게쿄는 사자후와 같으니 어떠한 병인들 장해를 할 손가”(어서 1124)

 

또 병에 걸려도 어떠한 처지가 되어도 광선유포를 관철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본존이 반드시 지킵니다. 제불, 제보살, 제천이 모두 그 사람을 지킵니다.

이 양약을 갖는 여인들을, 이 사인의 대보살이 전후 좌우에 붙어 서서 이 여인이 일어서시면 이 보살도 일어서시고, 내지 이 여인이 길을 갈 때는 이 보살도 길을 가시는데, 비유하면 그림자와 몸, 물과 물고기, 소리와 울림, 달과 빛과 같으니라”(어서 1306)

이 말씀대로 반드시 지킵니다.

 

(): 이것은 냉엄합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에 직면합니다.

그때 묘법의 궤도를 가는 사람은 법화경에 설해진 대백우거(大白牛車)라는 수레를 타고 유유히 영산으로 갈 수 있습니다. 대우주의 불계와 융합합니다.

 

대백우거는 길이도, 넓이도, 높이도 크기가 장대하고 게다가 전체가 금은을 비롯해 무수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금세에 일생성불(一生成佛)하면 그 부처의 경애는 영원히 이어집니다.

 

● 맺음 말

 

세세생생 태어날 때마다 건강하고, 유복하고, 머리도 좋고 최고의 환경에 둘러싸여 복운이 넘치는 인생이 됩니다. 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사명을 지니고 사명에 걸맞은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그것이 영원히 이어집니다. 두 번 다시 파괴되지 않습니다.

 

대성인께서는 이 영원한 행복을 위해 금세에 불계를 확립하세요, 불도수행에 힘쓰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불로 가는 궤도에서 멀어지면 안 됩니다.

 

롯데그룹 형제의 난을 보면,  

가슴 속에 스승을 갖고 사는 사람과 자기라는 아집을 갖고 사는 사람과 극명하게 비교됩니다. 신심을 하면서도 자기라는 아집을 갖고 사는 사람은

자기생명에 불계인 여의보주를 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