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불도수행은 자신의 생명을 한 없이 강하게 하는 수행
사람들의 숙명은 저마다 다른 거 같은데요? 열심히 하면 덩덩거리면서 무병장수하며 잘살 걸로 확신하고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그러질 못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중간에 죽는 경우도 있는데요.
본존님을 확신한다는 건 최악의 상황에서도 원경어업이나 신구의 삼업에 의한, 또는 나의 최악의 숙업이 어디까지인가 진지하게 사색하며 자신의 실천목표를 결의하고 교학의 내용이나 경문상의 내용을 의심 없이 믿는 것이 무의왈신 인 거 같아요.
맹신이란 제목하는게 도께비 방망이로 알고 있는 게 맹신이 아닌가 추축이 되는데요, 제 자신이 상당부분 도깨비 방망이로 반신반의 하며 제목을 시작한 거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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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님 질문에는 생로병사도, 원겸어업도, 신구의의 삼업도, 무의왈신도 있습니다. 분명 수행에 필요한 것은 다 갖춰져 있는 것 같은데, 뭔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어서와 선생님지도를 통해 대화해 가겠습니다.
● 불도수생이란 어떤 것인가?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불도수행이란, 일 차원에서 말하면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가 ‘자신의 생명을 한없이 강하게 하는’ 수행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극복해 갈 수 있다.’
‘어디에 가도 개척해 갈 수 있다.’
그런 강하고 강한 다이아몬드와 같은 자신을 만들기 위한 학회활동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난에 대해서도말씀하셨습니다.
“난이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금강불괴의 자기자신을 단번에 단련할 수 있는 찬스입니다.
대성인께서도 대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처자 권속을 생각하지 말 것이며”(어서 117쪽)
“설사 목을 톱으로 켜서 자르고”(어서 505쪽) 운운으로 엄하게 순교의 정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전부 부처가 되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 95사태야말로 자신을 단번에 단련할 수 있는 찬스입니다. 그러나 권속을 생각하거나 보신을 생각한다면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 올바른 수행을 하려면 어떤 사람에게 다가가야 할까요?
사회에는 수많은 미지의 사람이 있지만 그 속에서 도대체 어떠한 사람에게 다가가야 할까? 어느 시대나 변하지 않는 중대한 과제입니다.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미슐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강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강하게 해 주는 사람에게 다가가시오”라고, 약한 사람에게 다가가면 자신도 함께 안이한 타락의 방향으로 향하고 맙니다.
그러면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미슐레에 따르면 “그것은 ‘천재’와 ‘민중’입니다.
천재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다가가기 쉬운 사람이며 가장 싹싹한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민중 이상의 민중입니다.
까다롭고 뽐내는 사람은 천재가 아닙니다” 라고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내게는 바로 도다 선생님이 그런 천재였습니다. 또한 가장 강한 사람이란 니치렌대성인이십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천재는 이케다 선생님입니다. 또한 강한 사람은 니치렌대성인이십니다.
● 열심히 하면 덩덩거리면서 무병장수하며 잘살 걸로 확신하고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그러질 못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중간에 죽는 경우도 있는데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가 그대로 묻어나는 질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이나 가난으로 입신합니다. 그러다가 신심에 눈을 뜨면서 마음의 재보를 발견하게 되고, “스승에게 구제받는 존재에서 스승과 같은 편에 서서 민중을 구하는 존재로 자기의 본원의 삶을 확립하게 됩니다.”
아래 불교설화는 곳간의 재보, 몸의 재보를 얻기 위해 수행을 시작하지만 마침내 마음의 재보를 얻어 환희하는 내용입니다.
어느 날 먼 곳에서 불도를 구하기 위해 7명의 바라문 장로가 석존 곁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날마다 방에 모여 잡담을 늘어 놓고 흥겹게 웃으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 수행한다고 입신만 하고 권력에 안주하여 보신만 생각하는 집행부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수행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오사(五事)를 바라고 그것이 충복되면 스스로 만족한다.
오사란, 첫째 젊기를 바라고, 둘째 용모가 단정하기를 바라고, 셋째 힘이 충분하기를 바라고, 넷째 재산이 풍족하기를 바라고, 다섯째 사회적인 신분이 높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의지할 만한 것인가, 그대들은 날마다 하찮은 잡담을 하면서 웃고 지내는데 도대체 무엇을 믿고 그렇게 편히 사는가”
그리고 석존은 다시 한번 인생의 무상을 설하며 생로병사라는 사고가 있다는 것을 설해 가르치십니다. 그것을 듣고 수행자 일곱 명은 비로소 자신들이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마음을 고쳐 먹어 수행에 힘썼다고 합니다.(법구비유경)
“그대들은 무엇을 믿고 사는가” 이것이 석존의 물음이었습니다. 이 인생은 무엇을 양식으로 삼으며 살아야 하는가?
대성인께서는 “곳간의 재(財)보다도 몸의 재가 뛰어나고, 몸의 재보다 마음의 재가 제일이로다”(어서 1173쪽)라는 세가지 인생의 재보를 제시하셨습니다.
설화 속의 오사란 곳간의 재보와 몸의 재보에 해당합니다.
재산은 곳간의 재보입니다.
젊음, 외모, 건강, 그리고 능력, 지위, 신분, 명성은 몸의 재보입니다.
이는 모두 인생과 생활상의 가치이며 그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들이 과연 인생의 진실한 보배이자 영원한 양식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 필요도 없습니다. 재산이 있기 때문에 위협을 당하거나 살해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질투를 받거나 함정에 빠지는 여성도 많습니다. 명성과 힘을 믿고 교만에 빠져 인생을 그르치는 사람, 지위가 높기 때문에 권력의 마성에 마음이 잠식된 사람들도 우리는 자주 봅니다.
★ 지위나 권력의 마성에 잠식된 집행부는 깨어나야 합니다.
이 중에 영원히 지속되는 보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곳간의 재보와 몸의 재보는 결코 진실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인생의 양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적어도 그것만으로는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대성인은 “마음의 재가 제일이로다”(어서 1173쪽)라고 명확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마음의 재는 신심입니다. 신심이 바로 인생의 영원한 보배이자 양식입니다.
신심에는 무량한 공덕과 무변한 복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키나와 청년부 대표자 연수 스피치에서, 1988>
● 최악의 숙업이 어디까지인가 진지하게 사색하며 자신의 실천목표를 결의하고 교학의 내용이나 경문상의 내용을 의심 없이 믿는 것이 무의왈신 인 거 같아요.
‘최악의 숙업이 어디까지인가 진지하게 사색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의문맹(瑀蟻蚊腸)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색심(色心)이니라”(어서 382쪽) 땅강아지, 개미, 모기, 등에까지도 생명은 영원합니다.
십계호구가 생명의 실상이며 불계에도 구계의 고뇌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또 불계도 구계의 현실에서밖에 현현하지 않습니다.
바다가 존재하는 한 파도가 계속되듯이,
생명이 존재하는 한 숙업도 영원합니다.
법화경 적문은 구계의 중생이 수행을 거쳐 불계에 이르는 인과(因果)를 설했습니다. 법화경 본문은 본디 불계의 중생이 사람들을 구하는 구계의 수행을 한다고 설합니다.
즉 인과구시(因果俱時)란/ 수행을 거쳐 성불로 가는 구계→ 불계의 과정뿐 아니라,
성불을 거쳐 현실세계의 행동으로 가는 불계→ 구계라는 과정도 나타내고 있습니다.
“스승에게 구제받는 존재에서 스승과 같은 편에 서서
민중을 구하는 존재로 자기의 본원의 삶을 확립하게 됩니다.” 사람을 구하는 범부의 실천이 사실은 부처의 행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을 구하려는 불법의 실천이 이미 인생승리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형식적으로 적당히 하면 된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 이상의 선생님 말씀을 배독하면 스스로 답을 찾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괴로움을 업으로만 받아들이면 소극적이 됩니다. 그것을 ‘사명을 위해 떠안는 괴로움’ ‘나는 이 괴로움을 신심으로 극복하겠다고 서원했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원겸어업은 이 일념의 전환을 가르칩니다.”(법련2015.6, 135쪽)
일념의 전환 없이 원겸어업만 생각하는 것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은 “올바른 스승과 올바른 법을 만나게 된 기쁨”(법련, 2015,10, 85쪽)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은 인생의 스승을 만나는 일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생의 스승을 만나는 일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지키고, 가르쳐 인도하고, 육성해 주시는 스승은 인생의 가장 큰 보배입니다.
흉중에 스승을 품고 스승과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 무한한 도전과 성장이 있습니다.
스승과 함께 사는 인생에 막힘은 없습니다.”(법련2015.4, 88쪽)
★ 스승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자의 흉중에는 스승은 없습니다.
박재일은 등록문제로 스승을 팔아 자신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여상락은 내정간섭이라는 책략으로 스승을 협박했습니다. 김인수는 자신들에게 저항한다고 수천 수만의 회원들을 SGI반대파로 매도하여 제명시켰습니다.
학회에 닛켄종이나 공명당 등의 문제가 생기면 마치 선생님의 잘못인 냥, 스승을 불신하며 원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키워주고 성장시켜 준 부모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며 뻔뻔한 사람은 불효자입니다.
우리들도 불법을 가르쳐주신 스승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면 은혜를 모르는 축생과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흉중에 스승을 품고
스승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결의입니다.
은사 도다 선생님은 광선유포를 위해 인생과 사회를 이겨내는 근본적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창가 사제에 인생을 걸어라! 절대로 후회는 없다.”
“먼저 자신이 변해라, 절대로 남에게 의지하지 마라! 자신이 앞장서 싸워라!”
“지금이 승부의 때다. 난이 올 때에 신심을 끝까지 해내면 나중에 공덕이 크다. 제목을 끝까지 불러라”
“각오를 해야 한다. 남은 남이고 나는 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싸우겠다! 그 정신이 가장 중요하다.”(법련2015.4, 88쪽)
● 맺음 말
지금까지 (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마음의 재(財)가 제일이로다”(어서 1173쪽)
“불도수행이란, 일 차원에서 말하면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가 ‘자신의 생명을 한없이 강하게 하는’ 수행” 임을 말씀드렸습니다.
(2)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법, 올바른 스승, 그리고 자신을 단련해 줄 대난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최고의 법과 스승과 95사태라는 대난, 3박자 모두를 만났습니다.
“사제는 제자의 자각으로 결정된다”(법련, 2015,10, 93쪽) 입니다.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가 방법을 가책하는 것은 제자의 몫입니다.
(3) 그리고 스승에게 구제받는 존재에서, 스승과 같은 편에 서서 민중을 구하는 존재로 자기의 본원의 삶을 확립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사람을 구하는 범부의 실천이 사실은 부처의 행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을 구하려는 실천은 그대로 인생승리로 됩니다.
선생님께서는“한 사람을 위해 고민하고 기원하는 일이 최고의 공덕입니다. 시련을 완전히 이겨낼 때까지 끝까지 함께 싸운다. 한 사람에게서 기쁨의 이야기가 시작하기 때문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라 해도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이 근본이며 그 한 사람을 격려하고 그 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 평화를 위한 확실한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95사태 운운한다 해도 한 사람의 행복을 무시한 외침이라면 허세일 뿐입니다.
좌담회와 개인지도의 승리 없이 95사태 승리는 바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