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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일생 중에 반드시 증득하는 일생성불

myungho 2015. 10. 22. 14:10

(225) 일생 중에 반드시 증득하는 일생성불

 

 

 

 

 

 

제가 보는 일생성불은, 가장 괴로워하는 사람 속으로 들어가 괴로움과 슬픔을 함께하며 정법을 올바로 행하며, 악구매리 장목와석도 줄거움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을 삼세의 생명에서 바라보고 세계평화를 위하여

자신의 약점과 사투하는 것을 임종 시까지 게으름 없이 하는 것이

일생성불이 아닌가 추측하는데요 답변 요청합니다.

 

 

불도수행이 자신의 생명을 한 없이 강하게 하는 수행이라고 한다면, 그 결과로 얻어지는 일생성불은 어떤 경애일까 라는 의문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생성불의 인생은 어떤 인생인지 질문하는 분도 게십니다. 소설 <인간혁명과 신인간혁명>입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이 장에서는 성불의 상태와 경애를 중점으로 요약해 대화해 가겠습니다.   

 

● 자기 생명에 영원한 궁전을 구축한다.

 

 

니치렌 대성인은 미노부에서 멀리 떨어진 사도의 노부부인 고우 입도 부부에게 편지를 보내 격려하셨습니다. 어떤 곳도 정처(定處)는 없으며, 부처가 되는 일만이 마지막의 보금자리라고 마음을 결정하시라”(어서 1323)

 

마지막 보금자리마지막에 다다라야 할 안온한 우리 집, 안주하는 곳은 어디에 있는가, 그곳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습니다.

자신의 가슴 속에서 여는 불계가 바로 영원히 안주하는 곳입니다.

 

환경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멋진 집에 살아도 마음이 쓸쓸하다면 안온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쁨의 인생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지금은 좋아도 그것이 영원히 이어지지도 않습니다.

자기 생명 안에 불도수행으로 이룩한 안온한 궁전이야말로 삼세 영원합니다.(법련, 2015,10, 109쪽)

 

● 성불이란 어떤 상태인가?

 

니치렌 대성인께서는 ()이란 연다는 의의이고”(어서 7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 안에 부처의 생명을 여는 외에 성불이란 없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자신의 생명에 불계를 열어

그 확고한 경애를 맛보고 즐기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법화경 수량품에서는 중생소유락이라고 설했습니다.

 

또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성불(成佛)이란 목표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라 묘법(妙法)을 수지하여 끊임없이 광선유포의 투쟁을 계속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사람이 바로 부처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일생성불에 대해 니치렌 대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법화경의 행자는 여설수행을 하면 반드시 일생 중에 한 사람도 남김없이 성불하느니라, 비유하면 봄 여름에 농사를 짓는 데 조만(早晩)은 있을지라도 일년 중에는 반드시 이를 거둬 들이듯 법화의 행자도 상중하근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일생 중에 증득하느니라.”(어서 416)

 

그렇다면 우리들이 여설수행 하면, 일생 중에 어떤 부처의 경애를 증득하게 될까요? 

 

● 일생성불의 경애

 

(1) 자신의 특질을 충분히 살려나가는 것.

니치렌 대성인의 앵매도리의 각기의 당체를 고치지 아니하고 무작삼신이라고 개견하면”(어서 784)이라는 말씀처럼 성불이란 자기 자신의 본래 갖고 있는 특질을 충분히 살려 나가 자신을 가장 충실하게 만들어 가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자신의 일에 달인 등이 기대됩니다.

경제의 달인, 노래의 달인, 음식의 달인, 코메디의 달인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어려움에 직면해도 동요되지 않는 강한 경애

성불의 경애는 구체적으로 육근청정으로 나타납니다.

공덕이란 유근청정의 과보이니라, 결국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육근청정이니라” (어서 762) 생명의 전체가 정화되어

원래 갖고 있는 작용을 충분히 발휘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도 동요되지 않는 강한 경애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혼자 서는 자립의 인생이 기대됩니다

박재일 공양금 20억 유출 사기, 보험금 사기, 교통사고 사기, 이런 인생은 최저입니다.

 

(3) 악을 멸하고 선을 낳는 투쟁을 관철하는 경애

불계를 용현시키면서 그 생명력으로 악을 멸하고 선을 낳는 투쟁을 관철해 갈 수 있는 것 자체가 즉신성불입니다.

악을 멸함을 공()이라 하고, 선을 생함은 덕()이라고 하느니라, 공덕이란 즉신성불이고 또 육근청정이니라”(어서 762)

 

"불법은 마와의 투쟁입니다. 마와의 싸움을 떠나서 깨달음은 없습니다. 환희도 없습니다. 인간혁명도 없습니다. 불법은 없습니다. 못숨을 걸고 마와 싸우지 않으면 부처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법화경의 지혜, 4권, 110쪽)


니치렌 불법에는 이미 일생 중에 일체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대도가 열려 있는데, 왜 이 길을 안 갈까요? 이는 칠 대 불가사의 보다 백천만억배 더한 불가사의라고 생각합니다.

법화경 실천의 어려움에 대해 석존은 육난구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 여설수행을 왜 못하나?

 

우리들의 흉중에는 이미 부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안습니다. 말법은 시대가 탁하고, 사람들의 기근도 열등하여 승니도 타락이 극에 달한 때입니다. 근본 이유는 방법이라는 문제를 빼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방법은 정법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근저에는 정법에 대한 불신이 있기 때문입니다.(개목초, , 119)

 

정법은 만인성불을 설한 법화경입니다. 만인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도 성불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 것도 없이, 우리들 자신의 입신동기를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10 20년이 걸려도 고래심줄처럼 버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치의 병 때문에, 가난 때문에, 마지못해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나마 시작했다면 럭키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가서야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폭력을 휘두르며 죽기살기 반대하다가 입신한 사람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속을 썩이며 정법을 믿으려 하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부처는 인간과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래된 권위주의(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적인 종교관과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정법을 도저히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또 자신이 부처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인생 경험상에서 보더라도 쉽게 믿기 어렵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고경에 처했을 때, 이렇게 고생하는 자신이 부처가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인생이 평탄할 때는 이렇게 행복하다면 부처가 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정법을 믿기는 대단히 힘듭니다.(개목초, , 119)

 

하물며 약육강식의 축생계은 어떠할까요?

새나 짐승 등 동물의 경애입니다. 어리석음은 축생”(어서 241)이라고 있습니다. 삼독 가운데 우치입니다.

인간으로 말하면 눈앞의 것에 사로잡혀 사리에 어두운 것이 그 본질입니다.

그 대표가 성자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 집행부라고 생각합니다.

 

축생의 마음은 약함을 위협하고 강함을 두려워하느니라”(어서 957)로 말씀하셨듯이 정사, 선악의 판단을 하지 못하고 본능 그대로 살아가는 경애입니다.

자기 속에 정확한 선악의 기준이 없습니다. 규범도 없습니다.

본능적으로 행동하며 부끄러워하는 법이 없습니다.

힘의 논리입니다. 약육강식입니다.

 

만약 축생계로 빠져든다면 

눈앞의 것에 사로잡혀 사리에 어두운 것이 그 본질이니, 정법을 생각하는 마음을 찾기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로지 지옥 아귀 축생 수라를 유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신(人身)은 받기 어려우니 손톱 위의 흙이요, 인신은 갖기 어려우니 풀잎 위의 이슬이로다,”(어서 1173)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그 방향을 알게 될 것입니다.

 

● 맺음 말

 

지금까지 성불이 어떤 상태인지, 또 일생성불 하면 어떤 경애가 되는지, 왜 성불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지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95사태로 인권을 유린하고 스승을 협박한 것도 결국은 우치이며 불신(不信)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십계로 말하면 눈앞의 것에 사로잡혀 사리에 어두운 축생계가 그 본질입니다.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인생을 용기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후회하며 괴로워하는 인생은 불행합니다. 나는 용감했다. 나는 싸웠다, 그렇게 잘라 말할 수 있는 인생은 행복하다. 용기야말로 학회정신의 이명이다.

 

도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대 자비이시다. 그러나 우리들 범부가 자비를 내려고 해도 좀처럼 낼 수 없다. 그 자비를 대신하는 것은 용기이다라고,

용기를 갖고 광선유포를 위해 움직일 때 결과로서 자비의 행동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일생성불이라 해도 집행부처럼 용기 없으면 이룰 수 없는 경애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