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 법화경행자를 비방 훼손하려는 사람은
도리어 자신이 그 과보를
ㅇㅇㅇ지기님은 이중인격자 빨갱이/ 그런데 에전에 (5.15)지도를 캐캐묵은 지도라고 말하는 상급 교학간님도 계시지요. |
귀하의 글을 보면, 오래 전부터 학회를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닉네임을 보면 불도수행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 같기도 합니다.
여기는 불교 카페입니다. 인간혁명과 광선유포를 위한 대화의 광장입니다.
대성인은 “어떤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모두 꿈으로 돌리고 법화경에 대해 계속 깊이 사색하시오.”(어서 1088쪽, 취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케다 SGI회장의 방편품 수량품 강의에서 배운다>의 아정토불훼, 이중견소진과 14비방 중의 4선
그리고 환착어본인에 대해 사색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아정토불훼 이중견소진 / 我淨土不毁 而衆見燒盡
<‘아정토불훼(내 정토는 파괴되지 않는다)’. 이 사바세계는 구원의 부처에게는 불국토입니다. 부처가 중생을 구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본무대’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파괴될 리가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일념에 담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도다 선생님 강의에는 “우리 중생이 본래 부처이며, 묘법을 봉창하는 우리가 바로 부처”(위의 같은 책, 45쪽)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 세계를 겁화(劫火: 세계를 멸망시키는 큰 불)에 완전히 타 버릴 것 같은 예토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내가 부처라고 확신하고 중생을 끝까지 구하는 사람에게는 이 사파세계가 무엇으로 보일까요?
<지금 자신이 파괴되지 않는 정토에 있다고 확신하면 그 확신이 그대로 무너지지 않는 용기, 끝없는 희망으로 나타납니다. ‘무상의 예토(사파세계)’를 본래의 ‘상주의 정토(불국토)’로 바꾸려는 ‘변혁의 힘’이 넘쳐 흐릅니다.>
가수들에겐 ‘복면가왕’의 무대야말로 자기들의 무대가 됩니다.
그와 같이 부처에게는 지금의 촛불, 태극기 시위, 핵전쟁 위협, 사드배치 등으로 불타고 있는 한국과 같은 무상의 예토를 본래 불국토로 바꾸려는
변혁의 국토가 됩니다.
도다 선생님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 지상에서 비참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자 75만 세대 홍교라는 원업을 이루셨습니다."(법련, 2017, 2월호, 83쪽)
한국은 촛불과 태극기로 양극화 된 자중지란의 비참을 없애기 위해
5.15지도의 실천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5.15지도를 실천하는 카페가 마치 정치판 카페로 물들게 된다면
“선(善)은 그저 선이라고 생각하므로 소선(小善)에 의해서 대악(大惡)이 일어나는 것을 모른다.”(어서 1495쪽) 여기서 소선은 정치에 대한 게시글입니다.
광선유포가 아닌 정치판에 휘둘리면 대악으로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최신글 보기'로 들어가면 정치에 대한 글로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도리나 상식에도 벗어난 행위입니다.
“니치렌(日蓮)을 받아들일지라도 잘못 공경(恭敬)하면 나라가 망(亡)하리라.”(어서 919쪽) 잘못 공경한다는 것은 ‘행학의 이도’를 무시하고,
자기중심적인 편중된 길을 고집하는 행위입니다.
● 신앙은 내 일념의 대혁명
<니치렌 대성인은 “정토라 하고 예토라 해도 둘의 차이가 없으며, 오직 우리 마음의선악에 달렸다고 쓰여 있다.”(어서 384쪽, 통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마음하나로 세계가 변합니다. 인간 생명의 변혁이 곧 평화를 실현하는 근본입니다>
<‘이중견소진’은 미혹에서 미혹으로, 어둠에서 어둠으로 유전하는 중생의 눈에 비치는 사바세계입니다. 중생의 눈에는 세상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보입니다. 그래서 겁화에 세상이 완전히 타 버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겁화가 아니라 자신의 ‘번뇌의 업화(業火)’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견(見)’이라는 글자가 중요합니다. 중생은 이 세계를 고뇌가 충만한 땅으로 보지만 부처는 엄연히 불국토이며 정토라고 봅니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므로 대성인은 “어떤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모두 꿈으로 돌리고 법화경에 대해 계속 깊이 사색하시오.”(어서 1088쪽, 취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꿈으로 돌리고’, 대단한 정신력입니다. 일념의 힘이고 신심의 힘입니다. 신앙은 ‘자기 일념’의 대혁명,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변혁의 원동력이 있습니다.>
그래도 안 된다면요?
그렇기 때문에 불법에서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숙명전환과 광선유포를 위해 목숨을 내 걸고 불석신명으로 신행학에 면려해 가야 합니다.
“日蓮의 제자들은 겁쟁이로서는 할 수 없느니라”(어서 1282쪽)
<이 힘을 모르는 사람에 대해 “이 여러 가지 죄를 지은 중생은 악업의 인연으로 아승기겁을 지나도 삼보의 이름을 듣지 못한다.”라고 설했습니다. 여기서 ‘죄’는 묘법에 대한 불신이고, ‘악업의 인연’은 끊임없이 번뇌·업·고가 반복됨을 뜻합니다.
그 사람은 불국토에 있어도 스스로 자기 주위를 안개로 가려 눈앞에 있는 부처를 보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불신’ 때문에 완고히 마음의 문을 닫아 아승기겁이라는 긴 세월 동안 삼보의 이름마저 듣지 못합니다. ‘삼보’는 ‘부처’와 ‘부처의 가르침(법)’과 ‘그 가르침을 지키고 넓히는 사람들의 모임(승)’을 말합니다.>
● 환착어본인 14비방중에 경선, 증선, 질선, 한선은 정법을 행하는 사람에 대한 비방
법화경에는 십사비방(十四誹謗)이 설해져 있습니다.
법화경 비유품에는 14가지의 법화경에 대한 비방이 설해져 있습니다. 그 중에 ⑪ 경선(輕善), ⑫ 증선(憎善), ⑬ 질선(嫉善), ⑭ 한선(恨善)의 4가지는
정법을 행하는 사람에 대한 비방으로, 경멸하거나 미워하고 질투하거나 원망하는 것입니다.
귀하의 닉네임은 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 환착어본인(還著於本人)
또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제25의 문에는 “환착어본인(還著於本人)”이 설해 있습니다.
“‘도리어 본인에게 착함이라’라고 읽는다. 법화경의 행자를 비방하고 훼손하려는 사람은 도리어 자신이 그 과보를 받게 된다”(어서사전 1682쪽)
법화경 행자를 비방하고 훼손하려는 사람은 도리어 자신이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귀하의 닉네임에는 상대에 대한 한이 서려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불법은 십계호구를 설합니다. 십계의 각 단계에 다른 십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어떤 생명 경애에 있더라도, 그 속에 있는 불계를 불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라계를 전환할 경우, 중요한 것은 타인을 이기려고 하는 경향에서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남묘호렌게쿄를 창제함으로써, 그리고 타인도 같이 하도록 격려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타인을 보호하고 후원하겠다는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모든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궁극적인 힘이 제목의 사자후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청년이란 도전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법련, 2017, 01월 04쪽의 내용입니다.
<청년의 마음은 첫째, 도전의 마음입니다.
성훈에 “월월(月月)·일일(日日)·강성해지시라, 조금이라도 해이(解弛)한 마음이 있다면 마(魔)가 틈탈 것이니라”(어서 1190쪽)라고 씌여 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생각지도 못한 시련이나 막힘 또 자기도 모르게 찾아오는 타성이나 슬럼프와 벌이는 싸움일 것입니다. 그런 모든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궁극적인 힘이 제목의 사자후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목을 부르는 사람’은 지지 않습니다.>
● 맺음 말
지금까지 법화경 수량품의 “아정토불훼 이중견소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법화경 비유품의 14비방과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제25의 문에 설해 있는 환착어본인에 대해 배웠습니다.
신앙은 ‘자기 일념’의 대혁명,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변혁의 원동력이 있습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닉네임 등은 마침내 환착어본인이 되어 자신이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법련, 2월호 102쪽의 내용입니다.
<늘 배우려는 겸허함에서 그 사람의 크기가 나타납니다.
특히 리더는 조직에서 지위가 위라는 이유로 무엇이든 자신이 잘나서 그런줄 착각해 만심에 차고 맙니다. 그러면서 으스대거나 훌륭한 사람을 깔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자신의 복운도 사라지고 맙니다>
항상 우리들 가슴에 간직해야 할 말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