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해서 업을 만들어 고통을 받는 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광개토/ 차명호부장님 숙명전환시리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은 지금 법화경 행자의 고통은 법화경 비방의 죄가 원인이다. 라는 것과 말법시대의 중생을 화도하기 위하여 스스로 원해서 업을 만들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고통의 원인이 법화경 비방인지? 원겸어업인지? 아님 둘 다인데 제가 이해를 못하는것인지.... 바쁘신지 알지만 염치없이 답변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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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선생님의 지도와 법화경 수량품의 내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 이케다 선생님의 원겸어업에 대한 지도
“원겸어업은 단적으로 말하면 ‘숙명을 사명으로 바꾸는 삶의 자세’입니다. 인생에서 일어난 일은 반드시 의마기 있습니다. 또 의미를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이 불법자의 삶의 자세입니다. 어떤 숙명도 반드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개목초 강의)
불법자에게 최고의 의미는 광선유포입니다.
예를 들어, 간부가 병이라는 숙명을 전환하여 광선유포에 모범이 되었다면 이는 이미 원겸어업입니다. 또 숙명이라는 인연으로 부모와 자식이 만났지만, 부모가 자식을 광선유포의 인재로 성장시켰다며 이도 원겸어업의 삶의 자세입니다.
일념의 변혁에 따라 어떤 고난도 자신의 생명을 연마하고 향상시키는 기쁨의 원천으로 바뀝니다. 비애도 창조의 원천으로 바꾸는 것이 불법자의 삶의 자세입니다.
“대성인은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투쟁한 모습을 통해 악세에 사는 우리 범부가 숙명을 전환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진퇴양난의 업에 묶여 있는 사람이라도 그 본질을 보면 원겸어업의 인생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숙명은 있습니다. 그러나 숙명을 똑바로 꿰뚫어 보고, 그 본질의 의미로 되돌아오면 어떠한 숙명도 자신의 인생을 성장시켜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숙명과 싸우는 자신의 모습은 만인에게 인생의 거울이 됩니다.”
“숙명(宿命)을 사명(使命)으로 바꾸었을 때, 그 숙명은 악(惡)에서 선(善)으로 역할을 크게 바꾸어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숙명을 사명으로 바꾼 사람은 누구나 원겸어업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자신의 사명이라고 받아 들이고 전진하는 것이 숙명을 전환해 가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숙명을 없애려 하거나, 피하려 하거나, 도망가려는 삶의 자세라면 결국 숙명전환이 늦어지게 될 것입니다. 학회가 세계를 향해 도전하는 것은 인류의 숙명을 전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업을 경애에 따라,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사명과 원겸어업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 신앙은 내 일념의 대혁명
법화경 여래수량품에는 “이중견소진/ 而衆見燒盡/ 중생은 세상이 모두 불타 버리고”라고 설했습니다. 미혹에서 미혹으로, 어둠에서 어둠으로 유전하는 중생의 눈에 비치는 사바세계입니다. 중생의 눈에는 세상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보입니다.
그래서 겁화(세계를 멸망시키는 큰 불)에 세상이 완전히 타 버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겁화가 아니라 자신의 ‘번뇌의 업화(業火)’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견’이라는 글자가 중요합니다. 중생은 이 세계를 고뇌가 충만한 땅으로 보지만 부처는 엄연히 불국토이며 정토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어떤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모두 꿈으로 돌리고 법화경에 대해 계속 깊이 사색하시오.”(어서 1088쪽, 취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꿈으로 돌리고’, 대단한 정신력입니다. 일념의 힘이고 신심의 힘입니다. 신앙은"자기 일념"의 대혁명,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변혁의 원동력이 있습니다.
● ‘불신’때문에 아승기겁의 긴 세월 동안 삼보의 이름마저 듣지 못한다
이 힘을 모르는 사람에 대해 여래수량품에는 “시제죄중생 이악업인연 과아승기겁 불문삼보명/ 是諸罪衆生 以惡業因緣 過阿僧祇劫 不聞三寶名/ 이 여러 가지 죄를 지은 중생은 악업의 인연으로 아승기겁을 지나도 삼보의 이름을 듣지 못한다.”라고 설했습니다.
여기서 ‘죄’는 묘법에 대한 불신이고, ‘악업의 인연’은 끊임없이 번뇌·업·고가 반복됨을 뜻합니다. 그 사람은 불국토에 있어도 스스로 자기 주위를 안개로 가려 눈앞에 있는 부처를 보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불신’ 때문에 완고히 마음의 문을 닫아 아승기겁이라는 긴 세월 동안 삼보의 이름마저 듣지 못합니다. ‘삼보’는 ‘부처’와 ‘부처의 가르침(법)’과 ‘그 가르침을 지키고 넓히는 사람들의 모임(승)’을 말합니다.
● 맺음 말
니치렌 대성인께서는 “정토라 하고 예토라 해도 둘의 차이가 없으며, 오직 우리 마음의 선악에 달렸다고 쓰여 있다.”(어서 384쪽, 통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마음 하나로 세계가 변합니다.
자신의 업도 경애에 따라, 숙명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사명과 원겸어업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입니다.
인간 생명의 변혁이 곧 평화를 실현하는 근본입니다.